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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수봉 산천지길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54

○인수봉 산천지길○

 

 


- 밖을 향한 동경보단 안으로 다져진 내공


 ◇ 셋째마디 반 침니 구간을 선등하는 이창윤씨. 예전에는 크랙의 초입에 있던 나무를 밟고 일어서던 곳이다.

아침 방송에 출연한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N씨는 다시 ‘광야’에 섰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그의 잔잔한 한마디에 아직 바람 부는 벌판에 선 나그네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없는 바위가 목표였던 70년대의 산꾼들. 그들은 기쁘거나 슬플 때 산으로 갔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아랑곳 할 수가 없었고, 친구가 그리울 때면 바위로 달려가곤 했다. 배고픔과 추위는 같이 할 수 있는 나눔이었다.

산으로 가자.
산은 하늘이 가까워 좋다.
햇빛 가려줄 산림이 있고 누워 뒹굴 바위가 있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서늘하게 식혀줄 바람이 있다.
산에는 구름이 떠돌아 좋다.
오르는 발자국에 깨우침이 있고 바라보는 눈길에는 꿈이 펴진다.
여기 가냘픈 운명이 외진 곳으로 청운의 뜻을 띄우러 가자.

1972년 3월 10일 발행된 산천지 산우회의 회보 <바우> 2호는 위와 같은 시로 전문을 장식한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그때. 가수 김민기는 ‘아침이슬’과 ‘친구’가 수록된 단 한 장의 음반으로 시대를 우울하게 보낸 청년들의 서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는 길동무였으며 그들의 저항은 바로 문화가 되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살라는 오십 지천명을 넘긴 ‘산천지길’의 개척자들은 6·25전쟁까지도 기억에 담고 있으며 70년대에 젊음을 보낸 세대들이다. 고향을 두고 38선을 넘어와 삶을 개척해야 했던 실향민들의 터전 해방촌. 김진섭·최광국·안병찬·허수원 등 산천지의 창립회원들은 바로 남산 아래 해방촌에서 놀던 동네 친구들이었다. “우린 모두 태권도장을 다녔어요.
그땐 교회 안가고 태권도 못하면 행세하기 어려웠죠. ” “해방촌이 좀 거칠었어요.
주먹 못 쓰면 맨 날 얻어맞으니까. ” “그래도 그 때의 싸움은 몽둥이와 주먹뿐이었지요.”

 ◇ 이창윤씨와 김진섭씨가 둘째 마디의 등반이 끝난 테라스에서 뒤이어 오르는 김동숙씨를 기다리고 있다.


- 해방촌 친구끼리 산천지 창립

1947년생인 김진섭은 18세 되는 1965년께 해방촌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태권도장이 정릉으로 이사를 가자 그 끓는 에너지를 산으로 돌린다. 9시만 되면 서울역 시계탑에서 만나 줄창 산으로 달려갔다. 1970년께부터는 이미 산악회와 같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다. 어느 날 김진섭과 친구들은 백운대 뒤에 있는 칼바위에서 우연히 김동숙씨를 만난다. “칼바위에 갔는데 해방촌 놈들이 깝작거리더라고요. 알고 보니 많이 보던 친구들이라….
” “후암동 종점. 그리고 수원이는 방앗간 동네. 나는 파출소 해방교회동네. ” 동네가 같은 해방촌이라는 사실 하나로 이들은 단번에 친구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1972년4월 셋째 주. 산천지 산우회는 초대 회장 김진섭을 비롯하여 허수원·안병찬·최광국·김광선·김동숙·임은하·강동찬 등 8명의 창립 발기인과 변석원·허기원·윤완희·안병숙·송복희·송경희·유영숙·김봉순 회원 등 8명의 회원이 가세하여 창립을 맞는다.
실력에 못지않게 주력(酒力)이 등반능력의 상당 부분을 점하던 70년대. 히말라야나 알프스는 책에서나 보던 꿈의 대상이었다. 해외원정은 등반능력 이외에도 자금과 기획 등의 종합적인 능력을 필요로 했다. 지금은 웬만한 백수도 갈 수 있는 일본의 북알프스나 대만의 옥산도 그리 쉬운 곳은 아니었다.


산천지, 나는 이 이름에서 밖을 향한 동경 보단 안으로 수렴되어진 내공을 미루어 짐작한다. 해외 등반을 실현할 수 없던 청년들의 꿈은 그렇게 우리의 산 그리고 바위라는 무대에 펼쳐졌다. 많은 꿈들이 그 속에서 피어났다가 사라지고 아쉬움 속에 멀어져 가곤 했던 것이다. “자일 있어요?” “세 동. ” “주마는?” “주마 없어도 올라간다, 임마. ” 오랜 산친구가 아니면 나눌 수 없는 대화가 대슬랩 오름길에서 오간다. “1973년에도 평양상회는 있었어요. 28번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고요. 방학동 비포장 길을 걸어올 땐 배 밭을 거쳐 오다가 배를 까먹으며 넘어왔지요.

” 배는 곧 배고픔을 같이 했던 친구의 기억일 것. 김진섭은 당시의 기억을 그렇게 떠올리며 회상의 산을 오른다.

- 허수원·김진섭씨 등이 73년 6월에 개척

산천지길은 대슬랩 위의 오아시스에서 왼쪽 크랙으로 등반을 시작한다. 동면의 여느 루트와 마찬가지로 대슬랩은 산천지 길을 오르기 위한 출입문이다. 취나드B코스 왼쪽의 슬랩으로 이제 문을 막 통과한 일행들은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첫 마디도 오르기 전에 싸들고 온 김밥을 꺼내어 놓는다. 마치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몰래 도시락을 꺼내 먹던 것처럼. 오늘 이처럼 밥부터 먹고 수업을 하려는 학생들은 김진섭·김동숙·이창윤·김중연씨다. 김진섭씨는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산천지 길 개척의 핵심이었다. 코베아 회장 김동숙씨는 김진섭씨와 동기생이며 산천지산악회의 창립 발기인 그리고 김중연 씨는 60대의 나이지만 기계체조선수 출신으로 50대로 보이는 탱탱한 근력의 소유자.


4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선배들 틈에서는 막내일 수밖에 없는 이창윤씨. 그리고 또 한사람은 취재를 돕기 위해 온 한국산악회의 유학재씨다. “오늘의 선등은?” “창윤이가 갑니다.
” 김진섭씨가 그에게 교시와 같은 령을 내린다. 산천지산악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회원끼리만 등반을 한다. 현 회장인 최유섭과 동기생 안원호 총무는 등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딴 데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드는 만족감이 산천지에는 있다고 서울시연맹 회보에 발표한 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산천지에는 진짜 가족이 많다. 네 쌍이나 되는 산악회 커플은 초대 회장을 지낸 김진섭씨와 송희정 회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의 이름을 인수와 선인으로 지을 정도로 이들의 바위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산천지 길의 개척은 필연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1973년 6월 12일에서 24일 사이에 개척된 산천지 길은 허수원을 리더로 김진섭·김기흥·허기원·윤완희·박화식 등 6명과 산천지 회원 일동의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김기충씨는 여명산악회원이지만 개척작업에 함께 할 정도로 산천지 식구들과 절친한 관계였다. 개척 시작은 1973년 5월 여명길의 개척 때 가능성 있는 선을 발견한 것이 동기가 되었다. 기분 좋을 정도로 맑은 날씨에 톱 자일을 단단히 매고 6월 12일 시작된 개척 작업은 14일에 이어 18, 19, 20, 22, 23, 24일까지 7일 간의 작업 끝에 마무리되었다.


등반 장비는 60m와 40m 자일 두 동, 세 개의 해머, 점핑세트 드릴 2개, 12개의 각종 하켄, 볼트 8개, 4개의 레더, 카라비너 24개, 안전벨트 6개, 4m의 슬링이 쓰였다. 인수봉의 기존 루트는 이때도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급증하는 클라이머를 소화시키기 어렵다는 진단을 하고 있는 터였기에 새로운 길의 개척은 아직 풀어야 할 숙제였다.

- 세월도 막지 못한 산천지의 친구사랑

여러 갈래로 뻗은 가는 크랙 사이를 샅샅이 외듯 거침없이 오르는 창윤씨의 움직임은 인수봉에서 한 바위 한 몸놀림이다. 그의 왼쪽 옆. 패시길로 유학재씨가 출발한다. 오늘의 취재를 돕기 위해 줄을 묶게 된 그는 김동숙씨와 한 배를 타고 있는 트랑고사의 대표이다. 한 마디를 끝내고 신중한 밸런스가 요구되는 둘째마디의 크랙. 창윤씨가 프렌드 하나를 설치하고 볼트를 통과하여 간다. 예전에는 하켄을 치고 줄사다리를 걸던 곳이다. “야, 벙어리 크랙 끝내고 그 위에서 내가 슬립 먹은 데 아니냐?” “맞아요. ” 아픈 기억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질 수 없다.
그 곳을 지나 슬랩까지 가뿐히 오른 창윤씨가 셋째마디 크랙 앞에 서서 초입에 있던 나무를 못내 아쉬워한다.


그 나무가 살아있을 때 끝을 밟고 튕기듯이 일어서던 일은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는 몸짓이다.
한 스텝만 일어서면 레이백 자세로 연결되는 좌향 크랙은 다시 오른쪽 턱을 넘어 홈통처럼 패인 슬랩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활처럼 휘어서 활 크랙이라 부르는 곳까지 길이 이어진 듯이 보이지만 왼쪽의 밴드를 지나 오른쪽 크랙으로 가야 한다. “동수야, 올라와. ” “야, 스타트 한다.
근데 요기가 좀 이상해. 발이 따라 올라야 하는데 자꾸 짝발이 되잖아. ” 다섯 마디 깐깐한 슬랩이 이어지는 곳이 몸집 큰 김동숙씨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직 동수로 불린다. 해방촌 시절부터 그의 이름은 동수였으나 군대를 다녀 온 이후로 동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호적을 만들 때 잉크가 물가 ‘수’자의 삼수변에 떨어진 것을 동사무소 직원이 손으로 쓱 지우려다 그만 맑을 ‘숙’자처럼 된것이 이름이 바뀌게 된 원인이다. 군대에서 교관이 호적에 적힌 그의 이름을 보고 김동숙으로 불렀으니 김동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조인트 댓 방 얻어맞고 난 후 그는 동숙이란 이름을 물려받았고 그때부터 김동숙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성공이 바뀐 이름에 기인한 것이라고 결과론을 받아들인다. 9월 어느 일요일에 비를 맞으며 인수봉에 처음 오른 소감을 이제는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정든 산, 사랑의 산이라고 <바우>지에 발표한 그가 아직 등반의 현장에 있는 것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낙관이 습관처럼 된 것이리라.


사고 없이 산에 다닌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김동숙씨는 가난하게 산에 다녔기 때문에 원정자금을 모았는데. 그 돈을 쓸 새 없이 지나간 세월을 실감한다. “한참 때는 돈이 없어서 못 갔는데 돈이 모이니까 갈 사람이 없는 거야…. ” 여섯 마디 조금 쉬워지는 슬랩을 마치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몇 가지 길이 합해지는 곳이어서 볼트가 산재해 있다. 그 중 오른쪽 벽에 박힌 볼트를 이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앞서서 정상에 오른 이창윤씨.
그는 아직도 환상적인 파트너 이수복과 여명산악회의 솔로 김기흥씨를 잊지 않는다. 김동숙씨의 묵직한 걸음. 김진섭씨의 의지. 김중연씨의 세심한 등반. 산악이란 말보다 산우라는 말을 더 좋아한 산천지의 친구사랑은 가는 세월로도 멈출 수 없다.

- 신천지길 등반길잡이

산천지길은 1973년 6월 산천지 산우회의 김진섭·허수원 등이 주축이 되어 개척한 코스로 대슬랩 상단의 잡목지대에서 등반을 시작한다. 등반거리는 총 121m이며 둘째마디의 벙어리 크랙에서 짧은 슬랩으로 이어지는 구간의 자유등반 그레이드는 5. 10d로 평가 되어있으며, 넷째마디의 오버행을 지나는 슬랩은 5. 11a의 등급이 매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루트 파인딩은 불량하지만 확보와 탈출 조건은 무난하다.

첫 마디(20m)
여러 갈래로 갈라진 양호한 크랙을 재밍으로 통과한 후 상단은 레이백으로 오른다.

둘째 마디(28m)
벙어리 크랙을 지나 오른쪽의 인공 홀드를 통과한 후 슬랩을 올라 볼트에 확보한다.

셋째 마디(24m)
나팔처럼 벌어진 반 침니에 손 재밍을 하고 일어선 후 레이백 자세로 바꾸어 오른다.
예전에는 크랙 초입에 있는 나무를 밟고 올랐으나 지금은 재밍과 밸런스를 이용해야 한다.
한 스텝을 오르면 넓은 좌향 크랙으로 이어지며 오른쪽 턱을 넘은 후 볼트를 통과하여 홈통처럼 파인 슬랩을 지나 쌍볼트가 박힌 테라스로 진입한다.

넷째 마디(17m)
왼쪽으로 이어지는 밴드를 지나 재밍으로 크랙을 올라 오버행의 쌍 볼트에 확보한다.

다섯 마디(24m)
슬랩을 오르다가 인공 홀드 위의 볼트에서 오른쪽 슬랩을 통과하여 볼트로 오른다.

여섯 마디(18m)
깔깔한 슬랩을 올라 오른쪽의 쌍 볼트로 진입한 후 잡목지대를 거쳐 정상으로 오른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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