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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수봉 귀바위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54

○인수봉 귀바위○

 

 

 

- 그건 영락없는 시지프스의 몸짓이었다


 ◇ 1977년 9월에 인수봉 북릉에서 찍은 귀바위의 모습.


때때로 삶은 고독하다. 생활이 힘들어질 때 그리고 아름다운 젊은 날을 생각할 때도 역시. 고독의 수렁에서 헤어나 얼음 같은 현실을 마주할 땐 운명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인수봉의 귀바위. 그 은밀한 곳에 과거를 묻어둔 사람들은 바로 고독으로 젊음을 불태우던 청춘들이었다.이미 27년이 지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오늘 모인 최중광·김남준·이종화씨 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당시 나이 스물대여섯의 젊은이들이 그 거꾸로 선 천장에 바윗길을 내도록 불을 지핀 장본인은 불세출의 프랑스 등산가 가스통 레뷔파(1921~1985). 당시 한국의 클라이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모습이 담긴 <설과 암>(교진사)의 사진들을 보며 산을 향한 꿈을 키웠다.최중광은 어느 날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 같은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 그와 같은 사진의 주인공이 되고픈 꿈을 간직한다.

 ◇ 귀바위길 등반의 전형적인 실루엣 모습.


- 최중광씨 등이 77년 9월에 개척

“외로운 일이잖아요. 산에 가는 일이….”그는 외롭게 산에 다녔다고 말한다. 아니, 산에 다닌다는 일 자체가 외로움과 싸우는 일이라고 믿었다. 최중광은 함께 산에 올랐던 친구 김재열이 선인봉의 십자로에서 추락하여 산을 떠나자 고등학교 동기생인 김남준·이종화씨와 함께 1976년도에 산악회를 창립한다. 선배 이능수씨를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만든 산악회는 ‘고악’이란 이름을 가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높을 ‘고’자가 아닌 외로울 ‘고’를 마치 굴레처럼 써버린 것이다. “인수봉에 코스를 하나 내고 싶은데 선배들이 이미 다 했고 볼트 때릴 데만 남았더라고요. 그래서 기왕 할 바엔 힘든 데로 하자고 마음을 먹었지. 굳이 오버행을 택한 이유는 무식해서 그렇지요.”


이때의 인수봉은 이미 선배들이 굵은 선을 다 그어놓았고 할 수 있는 것은 볼트길 뿐.
때 마침 리오넬 테레이와 발터 보나티가 등반 불가로 판정했던 남미의 세로또레 동벽에 이탈리아의 마에스트리가 에어 컴프레서를 가지고 루트를 뚫어 찬사와 비난을 받은 사실에 힌트를 얻는다. 1977년 여름이 끝날 무렵, 최중광과 그의 동기생 김남준·이종화·유광호 등은 전년도에 설악산 비선대의 장군봉 전면에 네 마디짜리 길을 개척한 데 이어 귀바위 길을 만들기 위해 다시 모였다. 그 해는 대한산악연맹이 파견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국내 최초로 정상을 등정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고상돈씨가 9월 15일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여 산악계가 술렁대고 있을 때 고악회원들은 한창 귀바위 길의 개척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에델바이스 40m 로프 두 동, 에버뉴 점핑 세트와 익스펜션 볼트 그리고 알루미늄 발판 사다리 등으로 무장하고 귀바위 천정에 붙었다. 거꾸로 매달려 박기 시작한 볼트작업은 돌가루가 날려 눈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를 막기 위해 물안경을 쓰고 작업을 진행했고 볼트 방향을 45° 각도로 때린 것은 수직방향으로 힘이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두 동의 로프를 이용하여 두 사람이 이중 확보를 보았으며 사다리는 가스통 레뷔파가 오버행 천정을 건너갈 때처럼 두 조를 사용했다. 당시의 볼트는 총 15개를 박았지만 지금은 출발점으로 접근하는 부분에 2개, 바닥에 1개, 천정에 16개의 볼트가 박혀 있다.그리고 오버 행이 끝나면 턱 위에 또 하나의 볼트가 있고 그 위에 확보용으로 쌍 볼트가 있다. 약 6주에 걸친 작업 끝에 루트는 완성되었고 개척이 끝난 후의 소감이나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작업은 무난했다.

 

그러나 귀바위는 ‘고악’을 지향했던 이름처럼 쉽게 손님이 들지 않는 외로운 길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주인들도 산을 떠났으니 보수 작업도 쉽사리 할 수 없던 것이었다.

 ◇ 돌고래 또는 새의 부리를 연상케 하는 귀바위의 다양한 모습.


- 인생의 벽을 넘은 개척 3인방

최중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성장하기까지 세 명의 동생을 두고 산과 삶의 저울질에서 산을 앞에 놓을 수 없었다. 그가 30대 초반에 산을 떠나 사회로 돌아간 것은 오늘의 안정된 삶이 그 결과를 말해준다. 그는 산을 떠나 아마추어 무선인 햄을 취미로 하다가 그에 필요한 액세서리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도매업체로 일구어 놓았다.1978년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알프스 동계 등반을 한 것은 그가 산을 떠나기 위한 마지막 이별 여행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최중광과 함께 3인방이었던 김남준 그리고 이종화씨는 아직 젊은 날 산에서 배운 추진력을 간직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인생의 황금기를 산에서 보낸 것이 허비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괴로울 땐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지금 산에 오르지 않는다면 클라이머라고 말하지 말자. 과거에 클라이머였다고 말하는 대신 인생의 큰 벽을 넘어라.’ 이종화는 뜻밖에도 당시에 박인식씨가 썼다는 글의 요지를 마치 경문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인생의 벽을 넘었습니까?” “음…. 아직 넘고 있지요.” 귀바위 개척의 주역 최중광·김남준·이종화씨는 정말 인생의 벽을 넘은 듯하다.
김남준은 경륜 있는 기업인이 되었으며, 이종화씨는 산을 떠나 스키에 심취했다. 굳이 스키에 빠진 것은 산이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빠지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서 배운 추진력과 에너지는 또 다른 취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종화는 프리 스타일로 아마추어 대회까지 출전할 정도의 고수가 된 것이다.


오늘 이 3인방과의 만남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민남씨다. 이들과 첫 대면한 박민남씨는 3년 전 귀바위 오버행의 볼트를 전면 교체한 사람이다. 통상 바위 루트를 변형시키거나 보수 작업은 길을 만든 장본인이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방치된 길들은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가 볼트를 교체하면서 개척자들의 어려움을 짐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볼트 교체 작업을 해놓고도 정작 주인의 동의를 받지 못한 박민남은 주인공들을 만나는 일이 설레는 일일 수밖에 없다. 개척자들과의 만남을 그래서 행운이라고 표현한다.그런데 정작 주인공들은 오늘의 등반을 귀바위 아래까지 올라 사진이나 한 장 찍으면 되는 인터뷰로 생각하고 안전벨트조차 갖고 오지 않았다.


옛날식으로 하자면 귀바위 아래까지는 로프도 묶지 않고 다녔기 때문이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인수산장과 구조대에 들러 로프와 장비를 빌리는 신세를 졌다. 나이 서른이 되는 해인 1985년에 산에 입문한 박민남은 이전까지 소위 말하는 ‘날라리’였다.“처음엔 수통 차고 아가씨들 꼬신다고 한탄강이나 다니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산악회에 입회한 후 그런 산행을 접었지요.”
박민남은 인수봉 A코스 앞에서 슬랩을 오르지 못해서 딱 멈추었는데 그 곳에서 거봉산악회의 회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인도되어 산악회에 입회 한 것이 바위에 오르게 된 동기다. 지금까지 그가 인수봉에 박은 볼트는 줄잡아 백여 개는 된다. 대슬랩 오른편의 하강용 볼트도 역시 그가 박았다.


귀바위 오버행의 볼트 교체 작업은 안경채·최왕삼·김성수씨 등과 어울려 3년 전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인수봉에 오른 결론은 조금 씁쓸하다.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난 산에 다니면서 망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이것저것 다 포기하고 산에 오르지는 말라고 합니다.”오늘 개척한 선배들을 대신하여 시등을 자처한 그는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려 온 눈치다. 그러나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인수봉에서 중력 방향과 반대로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즐거운 일은 아니다.“오버행 끝까지 갈까요?”“네, 그럽시다.”“하지만 퀵드로를 회수할 수 있다면 턱 밑에서 돌아와도 좋고요.”벌벌 떨게 될지도 모를 것에 대비하여 다운 파카를 입은 뒤에 장비를 착용하고 박민남이 먼저 오른다.

 

그도 우리도 올 들어 첫 바위다. 볼트에 퀵드로를 걸고 로프를 통과한 후 확보 줄에 연결된 피피를 걸어 상체가 처지지 않도록 한 후 줄사다리를 옮겨 나간다.그런 후에 또 다시 퀵드로를 걸고 줄사다리를 이동한 후 피피를 사용하여 몸을 옮기는 인공등반은 순서를 정확히 반복하는 것이 요령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해오던 일도 막상 매달리면 줄의 간격이 맞지 않고 순서가 엇갈리는 것이 상례다. 마치 인수봉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형상이 되어 오버행에 대롱대롱 매달린 박민남이 또 외친다.“기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계속 올라가는 게 편하겠네요.” 이 말은 퀵드로를 회수해 달라는 주문이다. 그에게 등반을 중단하고 내려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 그것도 번복할 수 없는 일이다.확보줄과 줄사다리의 간격도 확인하지 않은 채 엄벙덤벙 먼저 붙고 본다. 막상 천정에 매달리니 생각보다 춥지 않다.

 

확보줄을 걸어 피피로 몸을 당긴 다음 줄사다리를 걸고 퀵드로를 빼내며 한 손 한 손 그리고 한 발씩 앞으로 나간다. 머리는 바위를 떠받치고 다리는 허공을 딛는 동작은 지옥에서나 할 일이다.현실에서 이보다 더한 형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언제나 바위가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는 신의 가혹한 벌을 받아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야 하는 시지프스의 몸짓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27년 전에 박힌 볼트만이 이곳에서 벌 받은 사람들의 몸짓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이제 형벌이 끝난 것일까?’ 드디어 마지막 볼트에 매달려 얼굴을 내미니 박민남씨가 소리친다.
“어, 벌써 와 부렀네!”‘벌써라니 지옥에서 왔는데….’입장이 다르면 기다림도 길고 짧음이 틀리게 마련이다. 매달리고 뒤틀고 꺾어야 하는 3월의 첫 바위. 그 형벌 속에 해가 져부렀다.

 ◇ 귀바위길 개념도

- 귀바위길 등반길잡이

인수봉 귀바위길은 1977년 9월 최중광·김남준·이종화·유광호 등의 고악회원들이 만든 두 마디짜리 볼트길이다. 20년이 넘게 방치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초고리악우회의 박민남씨와 안경채·최왕삼·김성수씨 등이 이곳의 노후된 볼트를 교체하였다. 귀바위 길을 등반하기 위해서는 고독의 길을 통하여 오른 다음 마지막 마디가 끝나기 전에 왼쪽으로 트래버스한 후에 천정 등반을 시작한다. 장비는 줄사다리 한 조와 퀵드로 20개 정도가 소요된다. 피피를 사용하면 이동이 편리하며 로프는 50m 한 동으로 가능하다. 등반이 끝난 후에는 한 동의 로프로 하강하여 내려올 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다시 고독의 길이나 기존 루트로 하강하거나 정상으로 오를 수도 있다.

첫 마디(25m)
귀바위의 천정을 오르기 위해서 고독의 길 마지막 마디 오른쪽의 홀드와 스탠스가 많은 골을 따라 오르다가 왼쪽 벽으로 트래버스하여 간다.두 개의 볼트를 지나서 삼각형 모양으로 경사진 테라스로 올라서 확보한다.

둘째 마디(15m)
바위면에 박힌 볼트를 지나 천장으로 매달려 오른다.볼트의 간격은 1m 남짓 하지만 지속적인 완력을 요한다. 천정에 박힌 16개의 볼트를 통과하여 턱 위의 볼트에 의지하여 일어선 다음 쌍 볼트에 확보 한다. 하강은 50m 로프 한 동으로 오버행 아래로 내려 올 수 있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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