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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인봉 남측 오버행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54

○선인봉 남측 오버행○

 

 

 

- 에코의 열창

 ◇ 오버행의 천정을 돌파하는 후배 김형식씨의 등반을 지켜보는 유기수·이완석씨


내 추측에 유기수씨는 또 하나의 도전을 꿈꾸는 듯이 보였다.그런 생각이 문득 든 것은 뜻 밖에도 강남의 한 술집에서였다.평소 술을 멀리 하던 그였기에 산악회 동료들도 소주와 맥주에 2차로 양주까지 마다하지 않는 그의 변화를 의아해한다.유기수가 30년씩이나 당뇨병과 싸워온 사실은 산악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그런데 당뇨에 술이 좋다는 자료는 본 적이 없다.인슐린을 맞아가며 등반을 해온 그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혹시 암벽을 오르듯 술을 도전의 대상에 포함시켜 버린 것일까. 선후배들이 그를 말리지 않는 이유는 늘어난 술친구 한 명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옛날엔 암벽과 빙벽을 하지 않으면 사람 같이 안 보였어. 그런데 아프고 난 후엔 산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좋게 보이더라고.

 

전에는 유도·태권도·합기도 다 했는데 등산하고 나서 다 끊었지. 66년도에 공부 열심히 하는 조건으로 로프를 구입했어, 그리고 비박이란 단어를 알게 된 거야. 테라스에 나가서 잤지. 스키는 너무 재미없어. 박쥐 코스는 1월 20일에도 한 적이 있어. 추워서 손이 어니까 ㄴ자로 손을 깊이 집어넣어야 했지. 김근원씨에게 하인리히 하러의 ‘하얀 거미’ 이야기를 듣고 알프스 3대 북벽을 생각했어. 어느새 간덩이가 곪아 간 거야.”유기수의 과거는 산악인들이 갖는 공통의 과정이지만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동기 6명 중 3명이 죽었어. 종철에게 침낭 주고 만수에겐 피켈을 주었지. 걔네들은 스무 살 시절의 모습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는데 난 이제 쉰여덟 살이잖아….”

- 57년 5월에 탄생한 에코클럽

1969년 2월 18일,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원정훈련에 임하던 한국산악회 대원들 10명이 예기치 못한 눈사태로 조난을 당했다.
그때 유기수의 동기 김종철씨와 이만수씨가 포함되어 있었다.당시 대원들과 합류를 하지 못했던 유창서씨는 뒤늦게 구조 활동에 참가해 노루목에 동료와 후배들의 시신을 직접 묻어야 했다.이 조난 사건을 계기로 유창서씨는 그해 가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저 산이 우리들을 부를 때
우리 모두 모여서 저기 저 산 오르세
바위보다 단단한 우리 마음 달래고
얼음보다 차가운 우리 정열 태우러
모여서 가는 곳 저 높은 산

연세대 산악부 출신이기도 한 이만수씨가 지어 놓은 ‘저 높은 산’은 에코클럽의 회가다.
그가 주선한 미팅에 나갔던 기억을 유기수씨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대개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산악회들이 1960년대 초에서 7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것에 비해 에코클럽은 그보다 한 발 더 빨리 1957년에 5월에 창립됐다.김일배·이경현·백관식·유창서·윤화중·김진수씨 등이 주축이 되어 창립을 보았고, 이희성·김근원씨 같은 유명인들도 에코의 이름으로 산악운동을 펼쳐왔다.


예순의 나이에도 바위를 즐기며 에코의 회장을 지낸 이완석씨는 그처럼 더 높은 선배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고참이 아니다.그는 산악회 선배로 설악산의 권금성산장을 지키는 유창서씨를 꼽는다.그리고 또 한 사람 김진수씨를 거론한다.유창서가 엄격하고 파워를 앞세우며 정통을 지향했다면, 김진수는 기술등반을 구사하며 개방적이고 낙천적이었다. 유창서와 김진수는 한 시대를 풍미한 명콤비였다. 여러 사람들이 아직 그 이름을 잊지 않는다.

 ◇ 에코클럽의 선배들이 크랙의 시험에 들게 한 김형식씨를 관전하고 있다.


- 전성기를 연 선인봉 남측오버행

이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던 1964년도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에코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 전성기의 시작은 선인봉의 오버행이 에코의 이름으로 떨어져나가던 해였다.선인봉의 남측 오버행은 김진수·윤상근·유창서씨의 기획으로 1962년도 10월부터 등반이 시작되었다.처음에는 유창서씨와 문규열씨가 주도를 했고 이은상·박경순·박남식·현정웅·최인국·방충식·이완석·김정규·오운소씨가 동참했다.사진작가 김근원씨와 김동수씨가 지원과 촬영을 맡았고, 등반장비는 알루미늄 사다리 한 세트(3개), 군용 카라비너 20개, 군용 로프 3동, 앵글 하켄과 우드 하켄을 썼다.필요한 장비 제작은 윤상근씨와 박남식씨 등이 했다.
오버행의 천정은 1964년 6월 15일부터 나흘 동안 연속으로 매달렸던 박남식씨가 김진수씨의 확보를 받으며 마지막 날인 6월 18일에 돌파했다.


두 사람은 하단의 크랙을 끝내면 언제나 망설여지는 그곳을 아침 9시 55분에 출발하여 저녁놀을 바라보며 출발점으로 돌아왔다.어쎈트산악회의 전병구씨와 오랫동안 자일 파트너였던 박남식씨는 남측오버행을 실질적으로 마무리를 하고 그 이듬해에 군에 입대한다.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신예가 등장했다.바로 유기수였다.그는 입회한 지 일년 만인 1965년에 선배들이 2년 걸려서 오른 곳을 반나절에 해치우며 ‘에코의 기수’가 된다.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 처음 우이암에 오르면서 산에 입문한 그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바위가 무서웠다.그러나 바위는 결국 그의 근성을 드러나게 해주는 존재였다.그는 또 다시 우이암을 올랐고 선인봉을 갔다가 에코클럽의 문규열과 박경순 회원을 만나기에 이른다.


“처음엔 배지를 안주다가 정규가 죽으니까 주더라고.”그는 바위만 보면 올랐다.토왕성폭포 우측벽, 인수봉 에코길, 설악산 적벽, 대둔산, 용화산, 희양산 등의 암벽들이 그의 손에 떨어져 나갔다.유기수씨는 에코의 선봉이 되어 전국의 암벽을 누볐다.1973년엔 또 다시 남측오버행을 너트만으로 돌파하여 산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새로운 등반을 즐기는 유기수씨는 자신의 등반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지만 초등반과 코스 제작의 의미를 혼동하지 않는다.새로운 그 무엇을 찾는 일을 즐기는 것은 등반뿐 아니라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유기수가 처음 소개한 장비는 씨에라 컵, 반다나 손수건, 포레스트장비, 민자(일명 빤빤이)창 암벽화, 고어텍스 의류 등 다양하다.

- ‘에코클럽의 미친 놈’

그가 미친 듯이 산에 빠져가던 어느 날, 10원짜리 삼립 빵 두 개와 물 한 통을 넣고 선인봉과 만장봉을 오른 후에 주봉과 오봉까지 거쳐 집에 가는데, 자신을 가리키며 “저 새끼! 에코클럽 아인데 미친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이야기를 들은 후 창피해서 그들의 앞을 지날 수 없었다.그렇게 미쳤다고 소문이 날 만큼 그의 등반은 집중력이 있었다.
말과 글로는 다할 수 없는 수 없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바위에 묻혀 40년을 흘러 왔다.
“이곳은 10년에 한번씩 하면 돼. 40년 산에 다녔는데 나 역시 네 번쯤 왔나?그는 그렇게 말을 열었다.줄곧 같은 곳을 다니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유기수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남측오버행은 쉽게 오는 곳이 아니다.


이날 새로 생긴 후배 김완기씨에게 천정까지도 올라보라고 권하는 한 마디는 오랫동안 열정의 불꽃을 태우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이제 코오롱등산학교를 졸업한 지 일년. 산에 눈을 떠가는 완기에 비해 5년은 되었을 김형식씨의 등반을 조금은 안도의 눈으로 보긴 하지만 아직 유기수의 40년 전과 비교해서 나아진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김형식씨는 12개의 프렌드를 꽂고 하단 직상 크랙을 올랐다.그러나 유기수는 전성기 때 8~9개의 하켄을 치고 통과했다.하켄 수를 줄이기 위해서 래더를 밟고 하켄 머리까지 딛고 해머를 쳤다.

- 뜻밖에 나타난 박쥐

첫째 마디를 인공등반으로 돌파한 형식이 둘째 마디를 살피는 중 이완석씨와 김완기씨가 뒤이어 크랙을 오른다.“우리 어머니가 나를 조금만 더 길게 낳아 주셨더라면….”이완석이 탄식을 하며 하단을 오르는 동안 유기수씨의 확보를 받으며 김형식씨가 천정으로 건너간다.4m쯤 되는 트래버스 길을 기어자자 유기수씨는 또 다시 툭 말을 던진다.“거긴 그냥 가는 거야. 뭐 박고 가는 데가 아니야.”“어이쿠! 난 그나마 이 정도 오르는 것도 감사드린다.”이완석의 힘겨운 소리가 뒤이어 들린다.“어! 박쥐가 있어요.”드디어 천정에 붙은 형식이 소리친다.박쥐 코스에 박쥐 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오래인데, 사람들 등쌀에 사라진 박쥐가 아직 선인봉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형식은 그의 아내 최수연씨와 젖을 떼지 못한 어린 아들 김건우가 저 아래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은 단 한치 앞만을 생각하며 한발 한발 나갈 뿐이다.촘촘히도 캠과 프렌드를 박는다.
충분히 숨을 고른 후 마지막 턱을 드디어 넘어가고 긴장의 시간이 흐른 뒤, 완료 소리와 함께 형식의 첫 오버행 등반은 추락 없이 무사히 마무리 지어졌다.밑에서 지켜보는 선배 김태삼씨와 아내의 성원 그리고 14개의 확보물을 설치한 값이다.유기수씨의 등반은 아무래도 망설임이 없다.선등이 아니면 등반을 해보지 않은 그가 후배의 확보를 받으며 오르는 오늘의 등반은 어려움보다 즐거움이 남는 일이다.오버행 천정을 지나면서 힘을 다 빼면 어렵지 않은 직상 크랙에서 고생 할 게 뻔하다.


내 차례가 되어 막상 벽에 붙고 보니 천천히 오르겠다는 다짐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몇 개의 프렌드를 거쳐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왜 이렇게 살지?’ 의문의 답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미 어떤 결론에 와 버렸다.힘겹게 올라선 남측오버행의 정상은 아주 좁아서 세 사람이 넉넉하게 앉을 수 없다.각자의 방식대로 조금은 수월하게 또는 ‘쌔빠지게’ 올라왔어도 그 복잡한 회로의 선을 동일하게 따라 왔다는 동질감이 어느새 충만하다.함께 나눈 좁은 정상은 선배가 말했던 대로 10년 후에 다시 서게 될지도 모른다.언제나 그 곳은 물리적으로 좁고 불편한 곳이겠지만, 무한하게 넓은 심리적 공간으로 오랫동안 마음의 휴식처가 될 것이다.함께 줄을 묶는다는 것. 그 일의 의미는 지겹도록 같은 몸짓을 반복했어도 또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40년 묵은 자일 파트너에게 해답이 있다.

 ◇ 선인봉 남측 오버행 등반개념도

- 선인봉 남측오버행 등반 가이드

선인봉 남측오버행은 1964년 에코클럽의 유창서·김진수·윤상근·박남식·문규열·이은상·박경순·현정웅·최인국·방충식·이완석·김정규·오운소씨 등이 개척 등반했다.초기 등반은 인공등반으로 이루어졌고, 1980년대 말에 자유등반이 이루어졌다.전체 구간은 총 72m이며 세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등반 난이도는 아랫부분 크랙이 5.11c로 평가되어있고, 오버행은 5.10d로 매겨져 있으나 난이도보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더 크게 작용한다.확보장비는 10개 이상의 작은 호수의 프렌드가 필요하다.등반 출발 선인봉의 왼쪽으로 돌아서 남측 아래까지 걸어서 접근할 수 있다.등반이 끝나면 오버행 정상에서 측면길 침니 쪽으로 내려 선 후 왼쪽으로 한 번 하강하여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 첫마디(25m)
크랙으로 진입하기 전, 왼쪽의 돌출된 바위에 슬링을 걸고 확보점을 마련한 후 출발한다.
발을 끼울 수 있는 첫 스텝의 크랙을 지나면 손가락 두 개 정도가 들어가는 크기로 줄어든다.이후 경사가 약간 완만해지는 부분까지 완력이 필요하다.크랙 상단은 스탠스와 크랙을 함께 이용하여 오른다.오버행 아래에 있는 볼트에 확보하고 자세를 낮추어 후등자를 확보한다.

- 둘째마디(25m)
오버행 출발점으로 건넌 후 확보물을 설치한 후에 출발한다.
모두 10개 정도의 다양한 크기의 프렌드가 필요하며 직벽 구간은 넓은 크기가 필요하다.
자유등반을 할 경우 오버행을 넘어 직벽에 오르기까지 힘의 분배를 요한다.
발과 손 재밍이 가능한 직상 크랙을 올라 움푹 파인 곳에서 마디를 끝낸다.

- 셋째마디(22m)
침니 스타일의 넓은 크랙을 레이백 자세로 넘어 정상까지 오른다.등반이 끝나면 정상에서 측면길 아래 침니에 내려 선 후 한 번의 하강으로 출발점으로 내려온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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