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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인봉 박쥐길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51

○선인봉 박쥐길○

 

 

 

 

- 늙지 않았다, 다만 올라갈 뿐이다

 

 ◇ 과거에 어렵게 통과했던 슬랩을 암벽화를 신고 가볍게 오르는 선우중옥 씨.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돌아온 선우중옥 씨를 만난 날, 시청 앞 광장은 마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듯 전운이 감돌았다. 월드컵 개최 1주년이 되는 날에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부안에서부터 ‘삼보일배’를 해오던 종교인들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인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건으로 이어져 있다. 그 속에서 사건이 아닌 일상사는 더욱 빠르게 잊혀져 갈 뿐이다. 하물며 빵과는 관계가 없는 산 이야기는 당연히 시류와 무관하며 언제나 엇박자가 되기 일쑤다. 그렇기에 산은 머물지 말아야 할 상대이지만 또 다시 돌아올 만한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온 ‘박쥐’

“창자가 끊어지는 줄 알았어. 아이스폴의 급경사를 쥬마링 할 때 힘을 주려고 호흡을 멈출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지.” 두 달이 넘는 원정에서 돌아온 그의 첫 마디는 아직 떨칠 수 없는 등반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는 지난 3월 중순에 홀로 에베레스트 등반길에 올랐다. 7300m의 캠프3에 세 번 갔었고 5월 21일에 8000m인 사우스콜에 도달한 후 정상 등반에 나섰다. 그러나 8300m까지 오른 후 등반을 접고 돌아섰다. 이유는 바람 때문이었다고 한다. 더 이상의 군말이 그에게 필요치 않았다.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몸은 군살이 빠져 예전과 같이 당찬 몸이었다. 아직도 컨디션이 좋다는 그는 선언하듯이 소리쳤다. 도봉산 박쥐길을 선등하겠으며, 후배들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13년 전인 1990년에 행해진 박쥐길 30주년 기념등반 때도 난 그의 등반을 지켜보았다.
당시엔 구인모·신승모·홍성암·주영·정승권·정재학·박기성·박열주·이원규·이광재 등 열 명이 넘는 쟁쟁한 하객들이 테라스까지 함께 올랐다. 오늘의 동지는 중앙고와 한양대를 대표하는 후배 박열주와 이상세, 그리고 그와 함께 40년을 지내온 구인모 씨다.
“걷는 데는 이제 난 도사다.” 그럼 형하고는 산에 안 가.” 아! 간식을 빠뜨렸군.” 그냥 가자. 배고파야 빨리 내려오지. 오늘 쭈욱 올라가자고.” 산에 나무가 많아졌어요.” 그건 구인모가 산에 안 왔기 때문이야.” 불 때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던 그의 습성을 선우중옥 씨는 그렇게 한마디로 꼬집는다. 신물나게 걸었던 캬라반에 비하면 그에게 도봉산은 너무 편안한 산길이다.


“옛날엔 유도문도 없었고, 할머니 가게도 없었어. 천일각은 있었나?” 치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은 산에도 적용된다. 큰 골격이 그대로 있을 뿐.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사람의 손길에 남아나지 않는다. 야! 그런데 오늘 내가 나중에 올라가야겠다.” 선인봉 바위 앞에 서자 선우중옥 씨는 선등을 하겠다던 약속을 갑자기 번복한다.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런 결정이 자연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미 63세가 된 그의 나이 때문이다. 후배 박열주 씨에게 선등을 넘긴 후 뒤를 따라 관바위라 부르는 첫 마디를 힘들게 오르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이전에 K크랙을 오르는 자세로 능숙하게 오르던 곳이다.

 

“도무지 팔에 힘이 없어.” 힘이 빠져서 날렵해졌어도 고소에 오래 체류하면 근육이 흐물흐물해진다는 사실을 그의 몸이 이제야 알아차렸다. “난 처음에 여길 갔을 때 신코스라고 불렀어.” 박쥐라는 이름은 곽철준 씨에게 들었지.” 우중옥이란 이름을 ‘박쥐‘로 연상하게 만든 장본인은 서울공대 산악부의 곽철준 씨였다. 등반이 이루어진 후에도 신코스로 부르던 길을 그가 등반한 후에 박쥐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언더 크랙의 날개가 박쥐의 날개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인데다가 실제로 박쥐들이 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잘 다녔어요.”   그럼 나처럼 엉터리가 아니지.”  곽철준·천호선·장승필, 모두 최고였어.” 형이 엉터리야?” 그럼. 난 엉터리야.” 그렇다면 머리를 잘 못 만난 형 몸만 불쌍한 거야.”
“그때는 산에 오면 천축사에서 잤지. 인심이 좋았어.”  인심이 좋은 게 아니고 형들이 깡패 같아서 잠자리를 뺏은 거지.”  본뜻을 이리 저리 넘나들어도 둘의 대화는 균형이 깨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온 우정의 바탕이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 다섯째 마디의 크랙을 오르는 박열주 씨. 이곳은 나무가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일행들 모두가 부담스러워 한 곳이다.


박쥐가 ‘찌익찌익’ 울어댔다  둘째 마디 날개자락에는 누군가 볼트를 박아놓아 이전처럼 프렌드가 없어도 확보가 되는 곳으로 둔갑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아무도 이 날개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없다. 1960년, 오늘처럼 여름이 오기 바로 전 어느 날, 선우중옥 씨는 한동네 사는 선배인 전광호 씨와 함께 도봉산으로 갔다.선우중옥 씨는 중앙고 OB를 거쳐 한양대에 막 입학한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고 3년 선배인 전광호 씨는 양정고 OB에 동국대 산악부원이었다. 일찍이 중학교 때부터 선인봉의 기존루트를 두루 섭렵한 선우중옥 씨는 그날 수평으로 이어지는 박쥐날개에 눈길이 멎었다. 색다른 곳에 도전해보리라 마음먹었던 그는 즉시 등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리고 담뱃갑에 선을 그어 등반선을 그려보았다. 준비는 그게 전부였다. 몇 개의 카라비너와 군용 자일 한 동, 그리고 정글화를 신고 온사이트 자유등반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첫 마디 삼각바위를 지나 관바위로 붙는 곳은 어렵게 생각한 곳이 아니었다. K크랙 자세로 그곳을 가볍게 넘은 다음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둘째 마디 박쥐날개로 붙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한번 추락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15m의 언더 크랙을 한 스텝씩 지나며 날개를 잡았을 땐 바위가 종이장 같이 얇아서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바위를 깰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턱을 넘는 순간 바위 속에서 박쥐가 ‘찌익찌익’ 하고 울어댔다.
실로 순식간이었지만 그는 이곳을 어떻게 건넜는지 몰랐다. 기쁨과 떨림이 섞인 감격의 순간이었다.하지만 기쁨은 잠시 뒤에 나타난 슬랩 앞에서 다시 긴장과 공포로 바뀌었다.

 

당시의 군용정글화로 슬랩을 직상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 애매한 슬랩에 신기하게도 점처럼 검게 돌출한 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중옥 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돌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혹점에 준비해온 슬링을 연결하여 쥐고 왼쪽 아래에 있는 홈통바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직상 크랙을 통해 테라스로 올랐다.만일 혹점이 없었더라면 그날의 등반은 소나무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스스로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옛날엔 여기, 똥줄 탔지.”구인모 씨 역시 이곳에 서면 난감했다고 술회한다.
“날개 꺾고 난 다음 우측 오버행으로 넘어 가는 길은 9월에 홍순국과 2차로 했어.”
그 아슬아슬했던 슬랩을 요즘 신발로 갈아 신은 선우중옥 씨는 물론 이상세 씨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쉽게 오른다.


그러나 오늘의 어려움은 박쥐날개가 아닌 다음 마디의 직상 크랙이다.예전 같으면 하켄 하나쯤 때려 박고 일어섰던 이곳이 껄끄러운 크랙으로 여겨지는 것은 선등으로 오르는 박열주 씨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스텝 정도를 오르면 점점 넓고 쉬어지는 크랙이어도 손 재밍을 하면 여지없이 손등이 벗겨나갈 정도로 바위가 살아있다. 이 크랙에 언제까지 나무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모두가 이곳을 쉽지 않게 오른 기억만은 뚜렷하다. 구인모 씨의 지론에 의하면 장비 없던 옛 시절의 등반이 지금보다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지금은 장비와 확보물을 믿고 더 어려운 곳을 과감하게 등반해 내지만 과거엔 100% 안전하다는 확신이 설 때 선등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절대로 떨어져선 안 되는 게 그 시절의 등반이었다.

- 아픈’ 현실이 더 소중하다

손등을 오무려 잡고 크랙을 지나온 모두의 손이 너나할 것 없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힘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는 부담스럽지 않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이, 어느새 동굴로 이어지는 마디의 마지막까지 등반이 끝났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등반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곳이다.“그냥 걸어가자.”“옛날엔 이곳에서 줄을 풀었어.”그래 지금 우린 옛날 길을 가는 거지. 모두들 동굴을 향해 알아서 오른다. 인수봉이 남성적인데 비해 선인봉이 여성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은밀한 곳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선인봉을 올랐을 때 막다른 길에 갇혀 어쩔 줄 몰라하던 기억이 새롭다. 동굴을 지나면 이렇게 정상에 새 세상이 펼쳐지는데….
할머니가게에서 오늘은 정상까지 올라가자고 말했던 선우중옥 씨의 의도는 어쩌면 이곳을 다시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까.


그가 에베레스트에서 8300m까지 오른 후 돌아선 이유는 바람이었지만 오늘은 한 점의 바람도 없다. 귀국하자마자 찾아온 오늘의 등반은 그의 나이로 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지 않았어도 그가 오를 수 있는 산이라는 걸 확인했으며 또한 녹록치 않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의 고향 도봉산이 그래서 더 그리워졌을지 모를 일이다.
선우중옥 씨가 돌아내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 뉴욕의 산악인 신승모 씨는 존 크라우커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한 대목을 전해왔다. 그는 약속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만일 가족·친지와의 약속을 무시했다면 정상등정을 감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명한 중옥 선배는 다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후배들과 선인봉 정상에 앉은 그의 모습에서 에베레스트 등반 보고회 때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그가 태극기 대신 들고 찍은 사진엔 ‘I LOVE 용선·리자·크리스티’라고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의 이름이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보이는 순간 선우중옥 씨의 눈시울엔 이슬 같은 눈물이 감돌았다.그가 에베레스트로 떠나자 이본 취나드의 와이프도 중옥 씨의 집에 찾아와서 왜 그를 보내서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는 것이냐고 눈물을 보였단다. 그에게 등반은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이자 삶의 돌파구였지만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현실이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닐까. 13년 전 박쥐길 초등 30주년을 축하해주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에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30년 전에는 단 두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많은 산친구들이 와서 기쁘다. 그리고 지금도 이 코스를 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43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그를 아끼는 골수 친구들은 그 때 보냈던 찬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박쥐는 늙지 않았다. 다만 올라갈 뿐이다.”

 ◇ 선인봉 박쥐길 개념도


-  등반길잡이 선인봉 박쥐길

박쥐길은 1960년 6월 선우중옥 씨와 전광호 씨가 불과 5시간 만에 초등반을 이룬 도봉산 선인봉의 대표적인 바윗길이다.전체 길이 170m에 여섯 마디로 이루어진 길이지만 경우에 따라 다섯 번 또는 일곱 번으로도 끊을 수 있다. 확보 장비로 중간 홋수의 프렌드 3∼4개 정도가 필요하다.등반 난이도는 박쥐날개가 5.8이고 혹점 슬랩과 테라스 위의 크랙이 5.9, 그리고 넷째 마디의 오버행 크랙을 트래버스하여 오르는 부분이 5.10a로 매겨져 있다.

 

-첫 마디 30m 삼각바위를 잡고 일어선 뒤 K크랙자세와 재밍으로 오르다가 오른쪽의 언더 크랙을 지나 피톤에 확보한다.

 

- 둘째 마디 20m 날개를 잡고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박쥐길의 상징부분이다. 과거에는 프렌드를 설치하며 올랐는데 지금은 날개 중간부분에 볼트가 설치되어 있어서 확보조건이 좋아졌다.


- 셋째 마디 20m 사이가 넓고 어렵지 않은 우향 크랙을 레이백으로 오른 뒤 하강용으로 사용하는 큰 소나무로 오른다.


- 넷째 마디 30m 이곳은 두 가지 길로 오를 수 있다. 덮개처럼 얇은 홀드가 좋은 크랙을 지나서 왼쪽의 혹점 슬랩을 통해 오르는 것이 먼저 개척한 길이며 오른 쪽의 오버행을 트래버스하여 넘는 길이 나중에 만들어진 길이다. 혹점 슬랩은 지금은 볼트를 확보용 볼트를 이용해서 오르기 때문에 확보용으로는 쓰지 않는다.이곳에서 좌측의 홈통처럼 패인 크랙으로 진입해서 테라스까지 오른다. 그러나 이곳은 테라스로 오르기 전의 볼트에서 마디를 끊는 것이 줄의 유통이 좋다.


- 다섯째 마디 35m 주먹과 손가락이 들어가는 크랙을 레이백이나 재밍자세로 오른 후 발과 손을 교차해서 오른다.손등을 크랙에 끼워야 하므로 장갑이나 테이프를 감고 등반하는 것이 좋다. 마디가 길어서 중간에 확보물을 설치하고 후등자를 확보할 수도 있다.


- 여섯째 마디 30m 넓은 크랙을 재밍하여 오르거나 오른쪽으로 건너가서 쉬운 크랙을 통해 종료지점까지 오른다. 보통 이곳에서 등반 루트는 끝이 나지만 나머지 크랙과 슬랩과 섞인 부분을 지나서 동굴을 통하여 정상에 이를 때까지도 주의가 필요하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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