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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인봉 청암길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43

  선인봉 청암길○

 


- 눈 속으로 사라진 세 악우의 염원


 

 

 ◇ 셋째 마디의 크랙을 넘어 까다로운 슬랩을 통과하는 모상현씨.



봄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이 비가 그치면 초목들은 눈부신 모습을 드러내고 황사로 흐려진 하늘이 열릴 듯하다. 때마침 궂은 날씨를 핑계 삼아 한 잔 술을 타진하는 휴대폰 메시지가 날아온다. 그렇지 않아도 기사가 써지지 않아 단단해진 머리를 한탄하던 차였다.
별 수 없이 타협으로 마음이 기우는데, “딩동” 컴퓨터에서 메신저가 울렸다. 이번엔 술이 아니었다. 발신을 한 후배의 이름을 보니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라 질문을 던졌다.
“80년대는 무엇이 생각나지?” “그때 한 산악부 선배는 휴교령이 내리면 서클룸에 가서 장비를 꺼내 산으로 갔답니다. 데모에 참가하던 친구들은 섭섭하다 했겠지요.”

 

“70년대는 부모 말도 안 듣고 산으로 달려갔는데 그땐 친구를 외면해야 했군.”60년대와는 또 다른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80년대에 일어났다.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것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이어졌고 한편으론 88올림픽을 준비하며 경제 도약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청암길은 그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한국의 클라이머들이 전통적인 등반 방식에서 자유등반의 흐름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청암길이 그어진 해인 1988년은 대다수의 서민들이 중산층을 지향했고 또 어느 면 그렇게 됐다.수많은 사람들이 산에 갈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 것도 그때 근면성을 발휘한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열심히 산에 다니던 후배가 있었어요.

 

데모 주동했다고 감옥에 갔고 열심히 정치하다가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한 7년 공부하다 그만두고 돌아 왔어요.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그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뭐가 힘들었지?”“시대의 무게였죠. 개인적 욕망은 묶어두고 시대의 요청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가자 했는데 지금은 다들 생활인이 되어서 살아가요. 돌이켜보면 억눌렸고 손해 본 것 같아도 또 한편으로 무척 자유로웠어요. 시대를 부정했지만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상상하고 시도할 수 있었지요. 요즘 한국 영화도 그 시절의 고민과 새로운 상상력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억압도 창작의 실마리가 되는군. 독재를 거부하던 젊음은 그 속에서 노동을 삶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중심에 있건 언저리에 있건 혹은 밖에 있었건 그 시대의 회오리에서 비켜난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생각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믿었던 이데올로기도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절대적 진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결과적으로 세상을 하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한편으론 씩씩했고 또 한편으론 우울했던 그때의 기억은 마치 두 개의 파동이 한 점에서 진폭이 합해지는 간섭현상같이 일어났다. 지나간 과거는 늘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 청암길 등반에 열성적인 활약을 했던 김성겸의 등반 모습.



 - 물개길에 이어 청암산우회 두번째 길

화창한 날 청암길을 오르게 된 것도 틀림없는 행운이란 말을 아낄 수 없다. 이곳에 오기 위해 1년을 별렀다. 작년부터 노후된 볼트를 보수하며 준비를 했는데 이제 서야 등반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청암산우회가 1973년에 개척한 물개길을 먼저 올라야하는데 순서가 바뀌었다. 짜장면 대신 짬뽕이 나온 격이다. 그렇지만 청암길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메뉴. 1987년 9월 6일 전홍 김성겸 최승회 김문식 나양일 이광범 등이 첫 개척에 시동을 걸었던것처럼 두 개 조로 나누어 등반을 시작한다. 선두 조에는 키가 작아도 다부져 보이는 황기수와 수더분한 눈매의 나양일이, 그 뒤에는 훤칠한 키의 모상현과 날렵한 몸의 김성겸이 섰다.

 

그중 모상현과는 10년 전 첫 만남에서 설악산 토왕성폭을 함께 등반한 적이 있다. 토왕성폭 초등 20주년 기념 등반 자리에 그가 있었다. 그때 초등자 박영배씨와 고인이 된 산 친구 신상만도 함께 있었다. 모상현과 줄을 묶어 본지라 그와 함께 오르는 청암길이 낯설지 않다. 오리지널보다 변주곡이 난해한 것처럼 80년대에 생긴 루트들은 대체로 ‘짜게’ 혹은 ‘쎄게’ 만들어졌다. 청암길도 그 중 하나다. 개척 당시엔 이미 오래 전에 등반을 시도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먼저 이곳을 시등한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당연히 볼트를 잡거나 밟고 오르던 루트를 지금은 자유등반으로 오르자니 더욱 만만치 않다. 경사진 슬랩에 붙으면 어디나 애매할 뿐이다.

 

간간히 크랙 사이로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가 그 살벌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상쇄시켜 주고 있다. 만일 이곳이 풀 한포기 피어나지 않는 반반한 슬랩뿐이라면 심리적 난이도는 더 높아지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로 좌향 크랙과 슬랩으로 이루어진 청암길은 바위 잘하는 회원들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슬랩의 첫 마디는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다. 왼쪽 C코스의 밑둥까지 걸어 오른 후 오른쪽으로 건너가면 둘째 마디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모상현 김성겸 김휘경씨가 첫 마디를, 황기수와 나양일씨가 둘째마디를 앞서 나간다.
밤새 술을 마셨다는 나양일은 세컨드도 부담스러워하는 반면 김성겸은 세련된 몸짓이 살아있다. 개척등반에 참여했던 두 사람의 동작이 대조를 이룬다.

 

오른쪽 방향으로 가다가 직상하는 둘째마디는 한 동작의 까다로운 홀드를 통과한다. 손톱 끝 한마디를 그립으로 모아 쥐는 홀드와 한 스텝의 급경사가 망설임을 불러일으킨다. 등반 동작이란 신체 구조와 스타일에 따라 주관적이고 개별적으로 적용된다. 되도록 자유등반으로 가고 싶은 모상현에 비해 볼트를 잡는 듯하지만 더 깔끔해 보이는 김성겸의 동작처럼. 하지만 네째마디 돌출된 슬랩에 부딪히면 가릴 게 없다. 닥치는 대로 볼트를 잡거나 밟아야 돌파가 가능하다. 1968년 12월 도봉산의 버찌골에서 창립식을 한 청암산우회는 지금까지 70여명의 회원을 배출했다. 창립회원이며 회원번호 1번인 임홍순씨가 청암의 산파였는데, 그는 당시 고등학교 2년생이었다.

 

40년 가까이 존속하는 산악회를 고등학생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놀랄 만하다. 이때의 산악회들은 종종 산우회란 이름을 썼다. 지금처럼 알피니즘을 표방하고 전문적인 등반을 하기엔 장비도 변변치 않았고 거창한 활동을 하기에도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굳이 험한 산이 아니어도 좋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임의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어딘지 휴머니티한 분위기가 나는 산우회란 이름이 당시엔 종종 선택을 받았다. 비슷한 분위기 또는 비슷한 이름의 산악회들이 있다.푸른 것을 좋아하는 청암·청맥·청화·청죽·청악 등 ‘청’자 돌림 산악회들이 그것이다.창립 시기도 비슷하고 산우회란 이름을 쓰는 것도 그렇다. 이 클럽들은 가끔씩 체육대회 행사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청암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풍파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아픈 구석이 없을 리 없다.

 - 세 명의 악우를 위한 세 번의 등반

심일랑 강원섭 조성환 임홍순 박학순 정덕윤 유부준 김휘경 한금균 등의 회원이 물개길을 개척했던 1973년도에서 1974년도쯤이 청암산우회의 1차 전성기라고 본다면 2차 전성기는 1980년대 들어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청암길 개척 전후였다. 1987년 9월 6일에서 1988년 5월 29일까지 2년에 걸쳐서 완성을 시킨 청암길은 김성겸 김문식 나양일 정용운 이광범 전홍 최승회 박민열 김재성 홍성모 심일랑 조해숙 성관모 김환중 이충렬 조원희 등 다수의 회원이 참여했다. 그 가운데 김성겸은 가장 열성적인 회원의 한 사람이었고 오늘 참여한 모상현은 1988년에 입회하여 회를 이끌어갈 기대주가 되어가고 있다. 교회 밖에 모르던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북한산 21야영장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다가 청암회원들과 만났다.

 

3학년이면 교회 총무를 맡아야 하는데 그게 싫어 친구들과 산으로 도망쳐왔다가 선배 이광범에게 걸렸다. 첫번에 ‘맥가이버 칼’을 선물 받으며 만경대를 올랐고 두 번째는 박민열에게 카라비너를 받았다. 그러나 그게 바로 당근이자 화근이었다. 한 개의 칼과 카라비너가 까까머리 중학생을 에베레스트와 K2 등 고산 거벽을 누비고 다니는 등산가로 만들었으니 당시 ‘삐끼’ 역할을 한 선배들은 남다른 혜안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회원들 간의 우애가 좋던 청암은 세 번의 사고가 일어났다. 그 첫 사고는 1987년 1월에 알프스 원정을 앞둔 훈련에서였다. 그때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를 맞아 경일현 성성모 박용찬 세 악우를 잃었다. 공교롭게도 가장 열성적인 회원이었고 알프스 3대 북벽을 목표로 했던 유능한 회원들이었다.

 

 비단 청암뿐 아니라 먼저 세상을 떠나는 대부분의 악우들은 뛰어난 등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산사람들은 능력이 딸려서 사고를 맞았다기보다 열정적으로 산을 좋아하여 위험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으로 믿는다. 한국산악회의 1969년 죽음의 계곡 10동지, 1976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설악골 눈사태 등을 비롯하여 예기치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산악인들이 모두 그렇다. 청암길 개척 때 선을 그으며 첫 작업에 참여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대균씨는 누구보다 등반능력과 체력이 탁월했던 친구 성성모를 못내 아쉬워한다. 어쨌든 세 악우를 잃어 전력이 손상된 상태에서도 알프스 원정은 추진되었다. 그

 

해 8월, 죽음의 계곡을 찾아 친구들의 동판을 바위에 새겨 넣은 후 나머지 대원들인 전홍 이경선 권정철 김문식 최승회가 알프스로 떠난다. 친구의 이름으로 알프스를 올랐고 거기서 애당초 목표인 3대 북벽은 오르지 못했으나 마터호른 북벽을 성공하고 돌아왔다.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청암의 산우들은 세 번의 등반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알프스 등반이었고 청암길 개척과 설악산 적벽, 무명봉, 장군봉을 잇는 삼형제길 개척을 완수했다. 오늘 청암길 등반에 모일 수 있는 것도 아직 그들의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선두 조가 오버행 언더크랙에 이르러 10개의 캠을 설치하며 오르자 밑에서 지켜보던 회원들의 일성이 터진다. 개척 등반 때 김성겸씨가 6개의 하켄을 치던 곳이다.

 

“왜 그리 많이 박어?” 여섯 마디 째의 오버행 크랙은 밑에서 보기에는 레이백 자세가 수월하게 나올 듯하다. 그러나 막상 붙어보면 생각처럼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또 다시 붙잡을 것에 대한 유혹이 일어난다.  선택은 자유다. 일단 크랙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기 시작하면 안전은 보장될지 모르지만 스타일은 엉성해지기 마련이다. 이곳을 넘어 마지막 일곱 마디의 슬랩도 역시 왼쪽 크랙에 피어난 진달래 가지를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일어난다. 굳이 이쪽으로 길을 뚫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마지막 슬랩 한 두 스텝은 짧아 보여도 그다지 널널하지 않다.


일곱 마디를 끝내고 오른쪽으로 우회한 후 잡목지대를 통과하여 정상으로 갈 수도 있으나 더 이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밑에 두고온 음식과 거리를 더 벌리는 것은 등반 능력과 별개의 의지가 필요하다. 아침에 헤어져 오후에 만난 선두 조 황기수와 나양일이 하강 로프를 걸어 내린다. “성겸형, 안 죽었네….” “의미가 있어 후배님들 하고 20년 만에 왔다는 것이….” 거세지는 바람을 타고 또 다시 산우들의 목소리가 청암길에 울려 퍼진다.
이 자리에 없는 동료들의 염원이 담겨있을 그런 아름다운 소리들이….

 ◇ 청암길 출발 지점에 모인 회원들. 왼쪽 아래부터 황기수 김회창 김휘경 다니엘 김 김성겸 이정훈, 뒷줄 왼쪽부터 모상현 이익형 김대균 나양일 박민열씨.



 - 청암길 등반가이드

청암길은 청암산우회가 1987년 9월부터 이듬해인 1988년 5월에 걸쳐서 개척한 길이다.
개척 대원으로는 김성겸 김문식 나양일 정용운 이광범 전홍 최승회 박민열 김재성 홍성모 심일랑 조해숙 성관모 김환중 이충렬 조원희 등 다수의 회원들이 참여했다. 천체 등반 길이는 190여m에 일곱 마디로 이루어져있다. 루트의 난이도는 크랙과 슬랩을 연결하는 세 째마디 부분이 5.11a이며 넷째마디의 볼트로 진입하는 구간이 5.10C, 다섯 마디 슬랩이 5,10b로 평가되어 있다.

 

 청암길의 접근은 석굴암의 오른쪽 위의 큰 꿀르와르를 이루는 C코스에서 오른쪽 하단부로 내려간 후 첫 마디를 시작한다. 그러나 첫 마디를 생략하고 둘째마디 출발점으로 걸어가서 등반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등반이 끝나면 오른쪽 잡목지대를 거쳐 만장봉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그 자리에서 하강이 가능하도록 쌍볼트가 잘 설치되어 있다.

- 첫 마디(30m) 비교적 쉬운 슬랩으로 등반이 시작된다.
이후 약간 왼쪽 방향으로 직상하여 쌍 볼트에서 종료한다.


- 둘째 마디(25m) 오른쪽 방향으로 조금 오른 후 볼트를 통과하여 철봉을 꺾듯이 발을 올리면서 손톱이 걸리는 홀드를 이용하여 몸을 끌어 올린 후 스탠스를 딛고 일어선다.


- 셋째 마디(30m) 레이백 크랙을 오른 후 손가락 첫마디가 들어갈 정도에서 오른손을 뻗어 크랙의 구멍 홀드를 잡는다. 이후엔 좌측으로 트래버스하여 크랙과 슬랩을 통과하여 확보지점에 오른다.


- 넷째 마디(16m) 왼쪽 방향으로 약간 트래버스 하여 첫 번째 볼트에 도달한 후 다시 볼트를 이용하여 직상방향으로 오른다.


- 다섯째 마디(35m) 왼쪽의 볼트를 통과한다. 미세한 리스를 이용하여 두 스텝 정도 슬랩을 지나 확보지점에 도달한다.


- 여섯째 마디(35m) 양호한 레이백 크랙을 이용하여 하켄에 도달 후 오버행의 마지막 지점에서 왼쪽의 크랙으로 진입한다. 이후 슬랩을 지나 확보 지점에 도달한다. 과거엔 인공등반 구간이었으나 지금은 보통 자유등반으로 오른다,

 

- 일곱째 마디(20m) 첫 번째 볼트를 통과하고 한 스텝의 까다로운 슬랩을 지나서 나무쪽으로 접근하면 종료 지점으로 오를 수 있다. 여기서 오른쪽 잡목지대를 거쳐 만장봉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왼쪽의 오버행 크랙을 한마디 더 오를 수도 있으나 이곳에서 등반 루트로 하강하는 것이 보통이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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