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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봉산 우이암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42

 도봉산 우이암○

 

 

 

- 보문산장과 첫 바위에 얽힌 기억

 

 ◇ 전면 침니에서 후면으로 나오는 트래버스 구간. 김미숙씨가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다.


죽은 듯이 꼼짝도 않던 생강나무에 노란 꽃망울이 터진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겨울이 생의 절정이었다 해도 또다시 시작할 수 있는 봄.
만물을 일깨우는 이때가 오지 않는다면 삶은 얼마나 비장할까. 주말 아침은 산에 갈 준비로 늘 부산하다. 차근차근 짐을 꾸려도 빠뜨리는 물건이 있기 마련이다.봄철 당일 산행의 주요 장비는 윈드 재킷, 랜턴, 수저, 비상식 등이지만 요즘은 휴대폰을 빼놓을 수 없다.
선글라스, 모자 등을 넣고 배낭을 꾸리는데 노란 표지기 하나가 툭 떨어진다.


주워보니 거기에는 ‘가고파 북쪽대간’ 그리고 ‘독도 동해’라 쓰여 있다. 백두대간 종주 때 주워서 배낭에 넣어둔 물건인 듯싶다. 독도와 우이암은 시공의 간극을 초월할 만한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러나 우이암으로 가는 날 내 발에 떨어졌으니 필시 서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 이른다. 생각해보니 남다른 지정학적 의미를 지닌 독도와 100m도 안되지만 엄연한 독립봉으로 대접받는 우이암은 어딘지 상통하는 데가 있는 듯하다. 요즘 시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독도 동해’라는 단어에 눈길을 멈춘다.

- 클라이머들의 종합등반 교실

한국산악회가 1947년과 1953년에 학술조사대를 파견할 당시까지 독도엔 일본 사람들이 박은 말뚝이 있었다.지금 그 자리에는 대한민국 동쪽땅 끝이라는 표석이 서 있다. 요즘 독도를 둘러싼 일들은 일본이 만든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1999년에 맺은 한일어업협정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곤란을 겪을 때 일본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겠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 설정을 막는 대신 중간수역을 받아들였다.바가지 씌우려고 곱절의 값을 부른 사람에게 반만 내겠다고 한 꼴이니 깎아도 이익은 없는 묘한 상술에 걸린 셈이다.


독도엔 안용복이란 이름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 숙종 때인 1693년 울릉도·독도로 고기잡이를 나갔던 어부 안용복은 일본 어선과 충돌했다. 일본으로 끌려간 그가 “울릉도·독도는 조선의 땅이며 일본 어부들의 침범은 부당하다”며 따졌다. 이 사건 뒤 1696년 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며 일본 어부들의 월경을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다시 우이암으로 돌아오면 그 아래 보문산장에 배용복이란 사람이 있다.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참 공교롭다. 배용복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우이암에서 전성기를 보낸 시대적 공감대를 가진 산악인들이다.

 

그는 1974년 무인이었던 보문산장에 들어와 지금까지 관리를 맡고 있다. 그러나 산장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철거될 운명에 처해있다. 시간과의 싸움은 언제나 슬프게 끝나고 마는 걸까.
대한민국 산악운동의 핵심 북한산. 그곳에 우이동의 이름을 낳게 한 우이암에도 어김없이 일본사람 이름이 등장한다. 원로산악인 손경석씨의 저서 <산 또 산으로>에 따르면 한국인 임무와 일본인 이이야마 다쓰오가 우이암의 기존 루트인 핸드 트래버스 코스를 처음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1929년 또는 1932년이 지금껏 우이암의 초등 연도로 알려진 기록이지만 1981년에 와서 이이야마는 우이암의 초등 연도가 1926년 8월이라고 수정했다고 한다.

 

혹시 독도가 일본 땅이며 동해가 일본해라는 주장과 상통하는 발상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우이암의 명칭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산과 인생>의 역자인 박성용씨의 조사에 의하면 우이암은 관음봉이며 도봉산 능선을 타고 오르는 중간의 형제봉으로 부르는 쌍바위가 우이암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용대(코오롱등산학교 교장)씨가 발굴한 조선시대의 유학자 홍량호의 <우이동 구곡탐사기>에는 우이동에서 삼각산의 백운대와 인수봉이 소귀처럼 보이므로 소귀리 또는 우이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료만으로 우이암의 명칭이 쉽게 고쳐질 바는 아닌 듯싶다.

 

어쨌거나 현재의 산악인들은 지금의 우이암으로 부르는 봉우리를 오르고 또 올랐다.
겨우내 근질근질했던 몸을 담금 질 하기 위해 달려가던 곳. 그 곳이 바로 우이암이다. 아기자기한 바위에 발달한 크랙과 홀드는 서울 출신의 클라이머들에게 종합등반 교실의 장이었고 주변의 아늑한 공간은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기 좋았다. 흔히 선배들의 의도적인 술심부름이나 ‘빳따’ 교육을 실시하기에 우이암은 더 없이 만만한 장소였던 것이다.오늘은 바로 그런 우이암의 기존길을 오르는 날이다. 처음 바위를 접하는 김민숙(방송작가)과 몇 차례 경험을 가진 조경숙(출판편집인) 그리고 조금 더 경험이 있는 김석우(영화감독)씨가 우이암에 신고식을 치른다.

 

이들을 정상으로 인도하는 사람은 1961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이암을 오른 지 45년 되는 구인모(한양대OB)씨다. 그도 역시 이 곳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온 선배 선우중옥씨를 만났었다. 선인봉 박쥐길 초등자 선우중옥은 당시 한양대학교 학생이었으며 구인모씨에게는 중·고등학교와 대학 선배이다.구인모씨와는 1996년 5월에도 이곳에 함께 왔었다. 그때는 고교시절 우이암에서 첫 바위 경험을 했던 보우산악회의 김정욱씨와 유기환씨가 동참했으며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과 유학재 트랑고사 사장 그리고 한양대OB들도 함께 올랐었다.

 

 ◇ 후면 하강은 정상에서 두 동의 로프를 이용하여 한 번에 하강 할 수도 있지만 몸이 오버행 밑으로 쏠리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작지만 쉽게 여길 수 없는 바위

“그 동안 변했나봐.”“바위도 많이 쪼개지고….”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눈 감고 다니던 길조차 잊어 버리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우이암 기존길은 아직 선등이 충분한 구인모씨가 ‘난 이제 톱은 안 할래’라며 속마음을 내 비친다. 그의 말은 선문답처럼 우회적이어서 본래의 의도가 아닐 수 있다. 필시 상대를 배려한 말임을 짐작한 내가 얼른 선등 로프를 몸에 묶는다. 침니에 몸을 넣고 비틀어 보니 그제서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요철 부위를 딛고 일어선 다음 이렇게….”“짝힘은…손가락으로 당기고 바닥으로 밀고.” 저게 말은 쉽지 우리에겐 절대 해당 사항 없어요.”

 

일행들에게 친절히 설명한다는 말이 곧바로 비판의 화살이 되어 날아온다.
조경숙씨는 물론 김석우씨도 예상보다 쉽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첫 마디를 마치고 막다른 벽 안으로 들어가자 일행들의 눈초리는 점점 더 길게 째진다.
10m쯤 되는 반 침니를 오르며 좌측 벽의 크랙에 발을 끼고 손발을 좌우로 벌려 오르는 방법을 설명해도 먹혀들지 않는 눈치다. 방송작가협회산악회의 부대장직의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김미숙씨만이 체면상 궁시렁대지 않을 뿐이다. 예전에 삼각바위가 침니 아래 부분에 끼어 있을 때는 등반이 지금보다 쉬웠다. 그

 

러나 삼각바위가 떨어져 나간 지금은 초보자들을 부담스럽게 한다. 여기선 포기하고 내려가는 일이 더 귀찮다. 군소리보단 홀드하나라도 눈여겨 봐두는 게 이로운 일이다.
레이백과 스테밍의 원리를 사람의 몸을 밀고 당기는 일에 적용시켜 셋째마디의 침니 구간을 돌파한다.그 모습을 위에서 보니 바위로 이루어진 꽃의 꽃술이 흔들리는 듯이 보인다.
쌍 볼트가 박힌 셋째마디 종료 지점에 도착한다.로프를 걸고 저 아래 바닥으로 하강할 수도 있으니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자,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나갑니다.”
째진 크랙에 손가락을 넣고 트래버스를 해 넷째마디를 건너간다.


이곳은 핸드 트래버스 또는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 교차시켜 횡단한다고 하여 ‘피아노 바위’로 부르던 곳이다. 다소 고도감이 느껴지지만 어렵지는 않다. 모든 밸런스를 요하는 루트가 그렇듯 정신 차리면 이곳 역시 초보자라도 문제없다. 다만 실수로 미끄러지면 시계추처럼 로프에 매달리게 된다.
10m 쯤 되는 트래버스 구간을 건너가자. 또 다시 원성이 터진다.“아니 여기까지 오면 걸어 갈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 그렇지. 저기 아래로 하강하면….”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잖아요.”“이제 다 왔다는 말을 믿는 우리가 잘못이지….”드디어 김석우씨까지 공격에 가세한다.

 

할말 없는 나는 다시 정상으로 달아날 채비를 한다.이곳은 1969년 5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잡지 <등산>지의 표지사진으로 찍혀진 장소였다.그 때의 모델이었던 임경식씨는 사진을 찍은 후 해외원정 훈련대에 발탁되어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사라져갔다. 책이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을 건너는 구인모씨는 바로 임경식씨와 함께 훈련대에 참가했다가 생존한 장본인이다. 우이암은 작지만 쉽게 볼 수 있는 바위는 아니다. 전면 왼쪽에 1969년 청봉산악회에서 개척한 오버행 하켄 코스와 기존길 바로 좌측의 고르고길.테라스에서 건너가는 팬듈럼 코스.

 

우정산악회가 개척한 전면벽이 아직도 만만하지 않다. 1973년 설악산의 토왕성 빙폭에서 단독등반을 시도하다가 떨어져 죽어간 요델클럽의 송준호도 1967년도에 전면에 정열을 바쳤다. 또 토왕성폭 초등자 크로니의 박영배씨는 눈도 녹지 않은 이른 봄, 후면을 단독 등반하다가 추락하여 중상을 입고 목숨을 건진 기억이 있다. 때론 도봉산에서 우이동으로 하산하다가 배낭을 벗어 두고 얼른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기도 했던 곳이다.

 

 ◇ 정상에 오른 김석우·김미숙씨가 우이암 첫 바위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 첫 바위는 언제나 동지를 만든다

마지막 다섯째마디는 오른쪽의 볼트를 출발하여 페이스 상의 홀드를 잡고 체중 이동하는 곳이다.김석우씨는 펌핑이 와도 어떻게든 올라야 한다는 입장. 김미숙씨 역시 부담이 되는 눈치지만 방송작가협회의 명예를 저버릴 수 없는 상태다. 이곳이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부터 느껴지는 고도감은 첫경험자들을 주눅들게 한다.구멍홀드에 손을 집어놓고 페이스로 나가서 든든한 느낌이 나는 왼쪽 벽의 나이프 하켄에 카라비너를 걸고 테라스로 기어오른다. 마지막 남은 정상으로의 도약은 키에 따라 방법이 다르다.

 

한번의 까치발로 손가락이 걸리는 홀드를 찾아낼 수도 있지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사람은 턱이 얕은 대신 고도감이 삼삼한 바깥쪽을 택해야 한다. 손가락이 걸리는 홈을 찾아내서 그곳을 잡고 정상으로 로른다. 뒤이어 형상을 기억하는 금속처럼 변함없는 솜씨를 구사하며 구인모씨가 올라왔다. 처음이라 어정쩡하지만 김석우와 김미숙씨의 오름짓도 무난하다. 언젠가 이런 순간을 그 누구에겐가 나눌 두 사람이 어느새 동지가 되어 손을 잡는다.기쁘고 시원하다. 겨우내 흔들리던 기운이 우이암의 첫 바위 접전으로 말끔히 사라진다.

 

 ◇ 우이암 전면 침니 등반 길잡이


- 우이암 전면 침니 등반 길잡이

우이암은 약 60m에 달하는 기둥형 바위다. 부분적으로 완경사도 있지만 총 10여 개의 등반 루트 대부분이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오버행 구간도 많다. 기존길은 전면 우측의 침니를 올라 후면으로 트래버스 하여 건너간 다음 정상으로 오르는 초급자 루트다.
초등은 한국인 임무씨와 일본인 이이야마 다쓰오로 전해진다. 초등 연도는 1929년으로 알려졌으나 1926년으로 수정한 바 있으며 1932년으로 발표된 자료도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김정태씨가 1930년대 중반에 등반했다고 한다. 우이암은 도봉산에 있지만 산행 기점은 우이동에서 오르는 것이 편하다.
그린파크 호텔입구에서 우이암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된다.

 

- 첫마디(25m) 양쪽 모서리가 둥근 V자 형태의 침니를 스태밍과 레이백을 혼합하여 동굴 밑으로 오른다. 이곳에서 크랙에 캠을 설치하거나 나무에 확보할 수 있지만 우회하여 넓은 테라스 위에 박힌 볼트에 확보하는 것이 편하다.

 

- 둘째마디(20m) 좌우로 갈라지는 침니 왼쪽으로 진입한 후 막다른 벽으로 들어선다. 크랙에 캠을 설치하고 확보한다.

 

- 셋째마디(15m) 경사 80도 정도의 V자 형태의 반 침니 속에 우향으로 뻗은 크랙을 이용, 레이백과 손 발 재밍을 혼합하여 오른다.침니가 끝나는 부분에서 왼쪽으로 자세를 바꾸어 도약한 다음 오른쪽으로 진입한다. 이 곳은 오른쪽의 우향 크랙에 중간호수의 캠을 설치하고 직상한 다음 왼쪽 턱을 넘어갈 수도 있다. 마디 종료 지점의 벽에 있는 쌍볼트에 확보한다.

- 넷째마디(10m) 일명 피아노 바위라 부르는 구간이다.
볼트 오른쪽 아래로 이어지는 크랙에 손가락 마디를 걸고 수평 이동하여 넓은 테라스로 건너가서 확보한다.

 

- 다섯마디(10m) 페이스상의 오른쪽에 설치된 볼트에 통과하고 왼쪽의 구멍홀드를 잡고 일어선다. 왼쪽으로 이동한 다음 직상하여 테라스로 오른다.
테라스 왼쪽의 하켄에 확보하고 오른쪽으로 걸어서 이동한 다음 정상부의 턱을 잡고 오른발을 걸고 오른다. 정상에 박힌 피톤과 볼트를 이용하여 확보하고 하강한다.
하강은 두 번에 나누어 할 수도 있고 50m 두 동으로 서면의 바닥까지 닿을 수도 있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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