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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설악산 4인의 우정길

행복한 사연 2008. 3. 31. 10:06

○ 설악산 4인의 우정길

 

 

고 최승철, 김형진씨가 연습을 위해 한 피치를 올랐지만, 정상까지는 등반되지 않았다는 노적봉 남벽의 정보를 갖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멋진 벽이지만 접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직 등반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던 중 작년 12월 월간山 색인집을 통해 76년 3월호에 크로니산악회의 노적봉 남벽 초등기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자세한 기사를 보기 위해 월간山 편집실까지 찾아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미 계획한 등반이기에 2002년 1월 신년연휴 때 노적봉 남벽 밑에까지 갔지만 체력 조절 실패로 후퇴하고, 5월 재도전에서 봉봉하켄과 링볼트를 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아무도 손대지 않은 벽을 오르려던 기대감은 깨져 버렸지만, 크로니산악회가 오른 흔적을 보니 당시의 장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슬링은 끊어져 있고 크랙과 크랙 사이에는 링볼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나마 링볼트 대부분은 체중의 충격에도 끊어졌다. 요즘 장비와 기술 같으면 볼트가 없어도 될 곳에 박혀 있어 인공등반에 심취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 열악한 장비로 이곳을 올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도전 정신에 머리가 숙여졌다. 더욱이 초등을 위해 오른 곳이 아닌가? 자그마치 26년 전에….

 

- 토왕골 Y계곡 초입에서 등반 시작

 

지난 여름 8월 내내 전용학, 김선영, 송재용, 최흥환 등 여러 회원들의 도움으로 노적봉 남벽에 ‘그들과 함께라 면’을 개척한 후, 곧 이어 소토왕골에서 오르는 ‘한편의 시를 위한 길’과 연계되도록 Y계곡에서 노적봉 정상에 이르는 ‘4인의 우정길’ 리지를 개척했다.

이 길을 초등하기 위해 산빛산악회 회원 4명(송재용, 심종혁, 남극봉, 필자)은 10월2일 오후 6시50분 강동역에서 만나 설악을 향해 출발했다.

 

늘 그곳에 서서 말없이 그 많은 사람들을 품어 안는 산, 수많은 산악인들의 애인이자 어머니인 설악, 이름만으로도 가슴은 설레는데 단풍 또한 절정이라는 보도에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 보고 싶은 안달감으로 다가온다. 오후 6시50분 강동역을 출발하여 밤 11시경 설악산 비박지에 도착해, 오랜만에 둘러앉아 조촐한 소주잔을 기울이며 정겨운 이야기에 설악의 밤은 깊어간다. 이튿날 새벽 6시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장비와 행동식을 챙긴 후 오전 7시10분 비박지를 출발한다.

 

 토왕골을 따라 오르는 길은 상큼하고, 크고 작은 여러 폭포들의 물줄기와 소리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토왕골 입구 매점에서 출발해 비룡폭포를 지나 고개를 넘어 쉬기에 좋은 너럭바위에 도착하니 오전 8시. 매점에서 약 30분 걸린 셈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둘러보니 먼저 물들기 시작한 빨간 단풍과 노란 잎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아직 단풍은 이른 듯하고 다음 주말쯤이라면 절정에 이를 듯하다. 땀을 식힌 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중간중간 묶여 있는 빨간 리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덧 토왕성이 웅장한 자태로 눈에 들어온다.

 

오전 8시40분 토왕골 Y계곡 초입에 도착해 장비를 착용한다. 리지가 시작되는 지점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노적봉 정상을 향해 5분 정도 올라야한다. 루트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보니 오른쪽 나뭇가지 사이로 빨간 리본과 볼트가 반짝인다. 장비를 착용하고 계곡을 넘어 출발한 후 약 3분 오르면 왼쪽으로 ‘그들과 함께라면’으로 오르는 흰색의 종이표시가, 오른쪽으로는 ‘4인의 우정길’을 오르는 빨간 리본이 매어져 있다.

 

 

지난 여름 엄청난 폭우를 쏟아 부었던 그 주 여러 회원들과 세찬 물살을 이리저리 빠지고 건너며 짐을 지고 올랐고, 그렇게 개척한 ‘그들과 함께라면’을 오르는 길 초입에서 만나는 시작 표시가 새삼 반갑고 ‘4인의 우정길’을 오르는 길의 빨간 리본도 또한 반갑다. 약 2분 정도 더 오른다.

 

- 남벽 3피치, 남동벽 2피치로 이어져

 

‘4인의 우정길’을 개척한 전용학님이 그려준 개념도(사실 그것은 개념도가 아니라 한 폭의 산수화였다)에 의하면 시작점에서 세 마디를 오른 후, 수풀지대를 20분쯤 헤쳐가 남벽 오른쪽 남동벽 하단에 도착해 두 마디를 오르면 노적봉 정상에 이르는 총 5마디의 길이다. 송재용 선배가 선등하고, 심종혁 신부님과 남극봉 선배 순으로 로프맨(등강기)을 사용하여 오르고, 나는 끝자로 오르기로 한다.

 

첫 마디를 모두 수월하게 오르고, 약한 오버행이 있는 둘째 마디에서는 오버행 좌측 상단 크랙에 프렌드를 설치하고 오른다. 오버행을 넘는 바위 사이에 나무 뿌리가 있으나 믿을 수는 없다. 손을 머리 위로 길게 뻗으면 홀드가 확실하게 잡힌다.

둘째 마디 종료 지점에서 셋째 마디 시작점까지는 수풀을 헤쳐 걸어가는 구간이지만, 초행길이라 루트가 불확실해 재용 선배가 잠시 길을 잃었다가 나무 사이에 보이는 붉은 색 리본을 발견하고 셋째 마디 시작 지점에 도착한다.

 

다시 확인해 보니 셋째 마디 시작 지점에 오르는 구간은 왼쪽 바윗길로 조심해 오르거나 오른쪽 나무계곡 사이로 모두 오를 수 있다. 첫째 마디 시작에서부터 펼쳐지는 토왕폭과 그곳으로부터 흘러 저 아래 계곡까지 이르는 물줄기, 한눈에 짚어보는 여러 리지의 등날들, 그 등날을 오르는 사람들의 꼼지락거림과 거대한 바위의 전경들은 높이를 더해갈수록 화려하게 펼쳐진다. 언제 보아도 새롭고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을 연출하여 셋째 마디에서는 그 절정에 이르는 듯하다.

 

 

 

 셋째 마디 종료지점까지 오르는 구간에서는 특별히 어려운 곳이 없고 홀드와 발디딤은 좋으나 흔들거리는 바위가 많아 낙석에 유의해야 한다.

오전에 맑은 날씨를 보이던 하늘이 어두워지며 먹구름이 밀려온다. 옷깃을 적실 정도의 빗방울과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번개 소리, 바람 또한 심하게 분다. 재킷을 꺼내 입고 오후 1시30분 점심 식사를 한다. 작년 겨울 큰 수술을 하신 후 열심히 산행을 하시며 극복하고 건강을 회복해가시는 남극봉 선배, 수술 후 잘 드셔야 하기에 늘 든든한 먹거리를 넉넉히 준비해 오시는 선배의 배낭 무게가 줄어든다.

 

설악의 깊은 속을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앉아 먹는 점심은 비록 그것이 퍽퍽한 한 조각의 빵일지라도 꿀단지를 핥아먹듯 꿀맛으로 흡수되어 넘어간다. 오후 2시경 정상에 오를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다. 저만치 앞에는 올라야 할 허연 바위가 우뚝이 서서 바라보고 있다. 천둥번개 속에 살 떨리는 경험 점심 후 험한 수풀과 바위 지대를 약 25분 정도 헤치고 남벽 우측 남동벽 리지 넷째 마디 시작 지점에 도착한다. 수풀과 바위 지대로 가는 길은 곳곳에 빨간 리본이 매어져 있고, 바위를 계속 넘어가거나 우회하여 남동벽 넷째 마디 시작점에 이를 수 있다. 바위를 끼고 오른쪽으로 우회할 수 있으나 전 구간에서 낙석에 유의해야 하고 바위나 나무는 반드시 확인하고 잡아야 한다.

 

넷째 마디 구간에 이르기 전 왼쪽으로는 지난 여름 개척된 남벽의 ‘그들과 함께라면’의 도도한 바위벽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꼿꼿하게 수직으로 서 있는 폼이 바라만 보아도 다리가 저린다. 그럼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왜일까?

넷째 마디 구간에 이르니 보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구간이 나타난다. 수직으로 선 벽에 오버행까지 있다. 재용 선배가 오르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루트 찾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초등 길에 루트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지 않아 애를 먹는다. 멀리서 보였던 오버행 위의 하강 포인트로 사용했던 노란 슬링은 보이지 않는다.

 

 

 

오버행이 시작되는 지점의 정면 직상과 오른쪽 루트를 살피고 시도하던 선배는 배낭을 내려놓고 왼쪽 크랙으로 넘어가 오르기를 시도해 오버행 확보지점에 이른다. 신부님도 로프맨을 이용 오르시며 동작이 불안하여 조금 고생했으나 무사히 오르시고, 남극봉 선배는 재용 선배의 벗어놓은 배낭까지 짊어지고 몇 번의 추락 후 배낭을 따로 끌어리니 무사하게 오르신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 등반자는 나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바람이 거세지고,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상당한 고도감에 공포가 밀려온다. 금방 어두워질 것만 같고 오버행을 넘어선 선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비록 멀리서 치는 것이지만, 천둥 번개를 동반한 날씨에 쇠로 만들어진 장비를 착용하고 벽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은 정말 살 떨리는 경험이었다.

 

왼쪽 크랙을 잡고 넘어서 오르는 오버행 구간은 이 루트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발디딤을 보기 위해 내려다보는 고도감은 참으로 압권이다. 크랙은 좋고 아주 어렵지는 않으나 고도감에 의한 몸의 경직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오르니 앞선 등반자들보다 수월하게 오른다.

 

다섯째 마디는 어렵지 않은 슬랩 구간으로 살살 걸어오르면 된다.  

약간 턱이 져 선등자와 후등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마디가 길어 바람이 조금 불어도 소리가 흩어져 잘 들리지 않는다. 

 

 

다섯째 마디에 이르니 이미 해가 기울어 어두워졌고, 심한 바람에 의사소통이 안되어 고생한다. 다섯째 마디 종료지점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가 노적봉 정상에 오르니 오후 7시이다. 각자 헤드랜턴을 꺼내 쓰고 하산을 준비한다. 바람은 가라앉았고 예정보다 너무 늦은 시각이었지만 무사히 정상에 오르니 감사하다.

 

2인1조로 등반해야 여유있어   

 

설악의 야경을 바라보며 감상할 여유도 없이 안전하게 하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한다. 소토왕골로 하산한다. 하산길에서도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선배를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구르는 돌들을 조심하며 소토왕골 암장에 이르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신부님이 준비해 오신 위스키를 한 모금씩 마시니 창자 깊숙이까지 타는 듯한 짜릿함에 실실 웃음이 나온다. 몸서리를 치며 한 잔 마신 재용 선배의 얼굴이 금방 상기되어 올라온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기분이다. 설렁거리며 열심히 걸어 어제의 비박지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되었다.‘4인의 우정길’은 고급 리지다. 처음 계획은 이 루트를 등반하고 ‘한편의 시를 위한 길’을 역으로 하산하려 했지만 정상에 너무 늦게 올랐기에 불가능했다. 계획대로 등반하려면 2인 1조로 나서야만 여유있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4인1조인 경우에는 노적봉 정상에서 소토왕골이나 ‘그들과 함께라면’을 하강포인트로 잡고 토왕골로 하산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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