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수봉 검악길
○인수봉 검악길○
- 한 여인을 그리며 열십자에 낸 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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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쾌한 스케일의 인수봉 남면. 검악길의 첫마디를 오른 최정희 씨가 뒤이어 오르는 이영준씨를 확보하고 있다. |
소설과 영화는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고 탐미한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랑은 그러나 바람이나 파도 같은 것°보이지 않으며 흔적도 없다° 아무리 열병을 앓아도 가질 수 없는 사랑은 다만 가슴에 남을 뿐이다°바윗길에 얽힌 과거를 밝히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산꾼들의 삶에는 어김없이 사랑과 열정이 그 배후를 점하고 있다. 검악길의 배경도 예외는 아니다. 노인의 건강처럼 가을날씨는 믿을 수 없다는 말처럼 지난주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평일에도 불구하고 그 날 백운산장까지 왔던 검악산악회원들은 모두 8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개척자 김정명 씨는 이 약속에 맞추어 미국에서 날아오기까지 했는데.하늘의 도움은 누구보다 산꾼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뿐이었다.
모두들 장비를 착용했으나 등반을 포기하기엔 악천후 말고도 더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했다. 산장 문을 나서는 것은 그래서 만만치 않았다. 그때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고 누군가 소리 쳤다. 어물쩍 넘긴 시간은 이미 뽑은 칼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구실이었다. 게다가 비가 멎기를 기다리며 마신 막걸리 한 사발은 망설임을 한방에 날려버렸고 그 힘으로 미련 없이 산을 내려갔다. 그러나 그 결과 올 가을 들어 제일 쌀쌀한 날을 맞았고 걱정 속에 하루를 넘긴 후 드디어 다시 검을 뽑는다.“오늘 날씨 따뜻하지요?” “바람이 없어서 너무 좋은데요.
”이미 겨울이 찾아온 인수봉을 오른다는 사실. 작은 홀드 하나에 발발 떨 준비가 된 우린 ‘행복은 사소한 일에 만족하는데 있다’는 충분 조건을 이미 넘고 있는 셈이다.산과 같이 대자유가 있는 공간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굳이 쓰는 것은 그래서 옥상옥이나 다름없다. 검악의 영원한 행동대장 최정희 씨는 예나 지금이나 천상 앞장 체질이다. 후배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검악길을 선등하는 것은 언제나 이곳만큼은 자신 있게 오르던 관성의 움직임으로 느껴진다. 함께 줄을 묶은 권순재(33세)·이영준(32세)·오상훈(29세) 씨는 검악이 아직 노쇠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후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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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째 마디 횡단 루트 구간. 이곳은 난이도보다는 고도감이 심한 곳이다. |
- 피톤에 새겨진 ‘69년 12월 검악’
첫 마디의 페이스는 첫번째 하켄을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는 곳. 볼트에 의지하지 않고 오른다면 5.10d로 매겨질 만큼 까다롭다. 그러나 볼트를 잡고 불법 통과한다면 그다지 어려움은 없다. 첫 마디는 그렇게 넘어간다고 해도 둘째 마디의 넓은 크랙은 언제나 애매함이 남는다.난이도 문제가 아니다. 최정희 씨가 크랙이 넓어지는 그곳에 프렌드를 설치하고 오르는데 능숙하게 오르긴 쉽지 않아 보인다. 그곳을 뒤이어 오르는 권순재가 너스레를 떤다. “큰일났네. 정희 형은 줄도 잘 안 댕겨 주시던데.”“어휴, 다리 쥐나네.”산전수전 겪은 고참 군인처럼 섣부른 자신감을 앞세우지 않는 그를 지켜본 후 나는 혹점을 밟고 왼쪽 슬랩으로 수월하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서니 자연스럽게 크랙 안으로 손이 빨려간다.
둘째 마디를 넘어 십자로 밴드에 서면 언제나 백운대에 오른 사람에게 시선이 간다. 사람 구경으로 한숨 돌리고 있는 사이 내 뒤의 오상훈 씨는 어찌된 일인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오른다. 불평 따위는 하지 않을 것 같던 이영준이 셋째 마디의 횡단 구간을 앞두고 엄살이 튀어나온다. “여기는 쉽게 갔었는데 까리 하네!”“뭐가 까리 하냐 시꺄. 버릇이 됐어 이….”우리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그의 독백을 정희 씨는 놓치지 않는다.이영준은 검악에 입회한 지 3년차 회원이다. 그런데 작년 5월에 선배들 틈에 끼여서 매킨리를 올랐고, 11월엔 네팔 트레킹도 모셔갔다. 그를 두고 선배들은 30년 걸려서 온 곳인데 3년만에 왔다는 뼈있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가 범상치 않았던지 최정희 씨는 20년을 입었던 붉은 색 코르덴바지를 덥석 물려주었다.
튼튼해 보이는 그 바지는 과거 최정희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붉은 색 바지를 입고 인수봉을 누비던 그의 젊은 시절 추억이 담긴….영준의 모습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순간, 필름 한 통을 떨어뜨렸다. 그런 실수는 처음이어서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때 최정희 씨는 퀵드로우를 하나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역시 등반 중에 장비를 떨어뜨린 건 두번째라고 한다. 마침 밑에서 후배들의 등반을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선배 조병태 씨가 그걸 찾아냈다. 꼭 필요한 곳에 그가 말없이 서 있었다. 지금의 후배들은 검악길을 오르다가 서투른 한문으로 ‘69년 12월 검악’이라고 새겨진 피톤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자부심을 얻곤 했다. 그러나 검악길의 배경을 세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김정명 씨가 일찍이 이민을 떠났고 선배들과의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도에 검악에 입회한 최정희 씨는 당시 백운대 정상 밑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서 추모제를 지낸 것을 기억한다. 그 비석은 바로 검악길 개척의 동기를 부여해준 백명순의 추모비다.
- 운명 같은 백명순과의 만남
1968년 여름, 우이동 버스 종점, 김정명은 장대같은 비를 피해 평양상회 앞에 서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고급 외제차가 한 대 멈추었다. 우마차도 아직은 당당하게 다니던 때니 외제 자가용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안에서 내린 사람은 늘씬한 미모의 여자였다. 외제 배낭을 멘 세련된 차림의 그녀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특별한 동행을 만난 것도 아닌 그녀와 김정명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여자는 숙명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인 백명순이었다. 간이 나빠서 건강을 위해 등산을 한다는 그녀와 김정명은 자연스럽게 산행을 함께 하게 되었고 후일 검악산악회에 입회한다. 초기의 검악회원들은 사학과에 재학 중인 그녀의 친구들과도 어울려 백운대를 함께 올랐다. 김정명을 만난 백명순은 세 살 위인 김정명을 따랐고 좋아했던 것도 분명한 눈치다. 이들의 산행은 그래서 더욱 즐거웠다.
어찌된 일인지 1969년 인수봉에는 ‘장마다 꼴뚜기’가 나는 해였다. 하늘길·동양길·서면슬랩·서면벽·하켄길·우정A·우정B 등 굵직한 기존 루트들이 태어났으며 검악·크로니·숨은벽 등도 바로 이때 개척의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산악잡지 <등산>지가 태어난 것도 바로 그해 5월이란 사실을 상기하면 1969년은 한국산악사에서 집중해 볼만한 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열의의 이면엔 사고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2월에는 한국산악회 해외원정훈련대가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를 맞아 10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명순의 사고도 바로 그해에 일어났다. 5월 31일 그녀는 백운대 정상 아래 마등이라 부르던 곳에서 불의의 추락으로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김정명을 만난 이듬해였다. 김정명과 검악산악회원들은 명순을 보내고 백운대 아래 비석을 세워 명복을 빌었지만 그로써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니었다.
백명순이 생전에 하던 유언 같은 말을 좀처럼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깔딱고개를 넘어 백운산장에 올 때마다 열십자로 그어진 남면을 가리키며 마치 검을 가르듯 “저 곳에 바윗길을 만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읊조렸다. 김정명이 그해 9월에 검악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사라진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작업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개척등반은 홍성복(재미)씨와 함께 시동을 걸었고 홍성도(홍익대 교수)·한민호(재미)·오영호(전 다이너스클럽 대표)씨가 참여했다. 그러나 십자로를 지나서 횡단 루트를 건너던 중 김정명은 작업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상실감과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듯 1971년도에 산을 떠났다. 그후 1975년도에 중동으로 나간 것을 계기로 1979년엔 프랑스 샤모니에 일년 가까이 거주하다가 1980년 12월엔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가 떠난 검악산악회는 사진작가였던 임석제 씨가 2대 회장을 지냈다가 3대엔 홍성복 씨가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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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악길 개념도 |
- 김정명에 이어 원준길·이인희 등이 완성
검악길 개척은 그후 원준길과 이인희 씨에 의해서 완성을 보았다. 검악회원들의 등반을 도와주다가 합류한 원준길은 당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던 클라이머였다. 그의 주도로 1970년 5월말, 드디어 검악길이 마무리 되었고 6월 1일엔 20여명의 산악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상까지 시등을 해보였다. 백명순이 죽은 지 꼭 일년만의 개가였다. 개척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 한 사람은 이근배(펜싱협회 부회장)씨였다. 그는 부친의 철공소에서 제작한 피톤을 공급했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검악산악회의 창립도 1968년 초 한국체육대학의 펜싱 코치를 하던 이근배 씨가 김정명 씨에게 후배들의 체력훈련 요청을 한 것이 그 동기가 된 것이다.
김정명은 처음에 그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에스크림 알파인 클럽’이란 산악회를 만들어버렸다. 에스크림은 펜싱의 불어표현이다. 지금의 검악이란 이름은 시연맹에 등록하기 위해 한국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퍼뜩 ‘검’자를 생각해 낸 고 강호기 씨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건국대 62학번이던 김정명은 그의 대학 후배로 사람 좋은 크로니의 김항원을 기억한다. 최수남·김인길·신성삼 씨 그리고 김명수·최창민·김인섭 씨 등과 동시대를 지냈고 인수산장의 이경구 씨와도 친구 사이다. 지금의 검악은 선배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장세규·조병태·이명걸·이준 씨 등이 주축이 되어 일구어낸 결실이다.
그 뒤의 세대엔 송원우(미국 시애틀 거주)·한근상(워싱턴 거주)씨와 최정희·김재봉·권희서·오광석·장윤학·엄운용 등이 지금까지의 근간을 만들었다. 검악은 벽 등반을 추구하며 즐긴다. 1988년 뉴질랜드 마운트 쿡 캐롤라인 남벽 등반을 비롯하여 1989년엔 아이거·마터호른 북벽 등정, 1990년엔 세레토레·피츠로이에 이어 2002년도까지 알래스카의 헌터봉·매킨리봉, 남미 아콩카구아, 히말라야 시샤팡마 등의 등반을 성공으로 이끌어냈다.
내년도에는 매킨리 동계 등반을 늘 해오던 일처럼 준비중이다. 검악의 선배 세대들은 백운대에서 죽은 백명순을 잊지 못하지만 지금의 검악인들은 장윤호를 가슴에 묻고 산다. 호랑이 굴을 등반하다가 근육파열이 발단이 되어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난 장윤호는 의리 있고 정 많은 친구였다. 그가 살았더라면 검악의 모습은 달라져 있을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 여자가 없는 검악산악회
지금 검악에 여자는 없다. 음양에는 원래 천벌이 없다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들은 남자들만의 분위기를 고집한다. 애교 섞인 여자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만큼의 사랑은 그래서 후배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의 표현이 채찍이 되어도 결국은 더 큰물을 경험하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셋째 마디가 까리하다는 영준의 엄살을 그래서 최정희는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다. 보다 더 어려운 벽에 오르길 바라는 선배들의 마음은 그렇게 일상에서 또는 인수봉에서 던지는 한마디에도 복선이 깔려있다. 십자로 크랙은 넷째 마디에 이르러 끝이 난다. 이후의 길은 실처럼 희미한 금으로 이어진다.
횡단길을 편하게 건너온 후 마지막 다섯 마디의 등반을 앞두고 최정희 씨가 내게 루트를 확인한다. 이전에는 하늘길이나 동양길 등의 슬랩을 통해 올랐으나 선배들이 그어놓은 개척라인으로는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마디의 긴 크랙은 크로니산악회와 공동으로 개척했다고 공식 합의를 한 곳이다. 두 산악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개척을 시작하여 마무리 또한 같은 때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곳을 다 통과한 후 정상으로 오르는 한마디의 크랙을 두고 서로 우리 길 입네 하는 식의 선점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고서를 발간한 크로니는 이 길로 통하여 정상으로 선을 그었고 오늘 개척루트를 확인한 검악도 꼭 같이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되찾은 셈이다. 오늘의 마지막 여섯 마디는 등반 루트로 치기엔 어색하지만 그래도 이곳을 통해야 정상을 밟을 수 있다. 잡목지대를 헤치고 정상으로 올라서니 좋은 날씨에 행복해 하는 산악인들과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 38기 졸업생들이 반가움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처럼 작고 사소한 일에 무진장 애쓴 결과 이곳에 오른 사람들이다. 쉽게 오르는 것이 의미가 없다 해도 정상에 서는 것마저 보람없지는 않다. 기다림이 있는 인수봉의 하강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삶의 비전이다.
검악길은 김정명(재미)·홍성복(재미)·원준길(전 레드페이스 근무)·이인기(건축업)·홍성도(홍익대 교수)·한민호(재미)·오영호(전 다이너스클럽 대표)·허일·이근배(펜싱협회 부회장)씨 등에 의하여 1969년 5월에서 1970년 5월에 걸쳐 개척한 길이다. 등반 길이는 총 6마디에 153m이며 인수봉에서 가장 긴 횡단길이다. 남면의 십자로를 수직으로 오른 후 오른쪽으로 밴드가 끝나는 곳까지 간 후 다시 크랙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진행이 독특한 길이다. 난이도는 첫마디 크랙 아래의 페이스를 자유등반할 경우 난이도가 5.10d이다.
그 이후의 밴드를 횡단하여 건너는 구간은 볼트를 이용하여 건넌다. 횡단 구간은 볼트에 의지하여 건너게 되어 난이도는 어렵지 않으나 고도감이 세다.
첫마디(25m) 남면 아래의 요철이 많은 바위지대에서 출발하여 십자로를 향해 가기 위해서 먼저 모서리의 하켄에 줄을 통과하고 오른쪽 페이스로 넘어간다. 페이스에는 볼트가 이어져 있으며 짧은 크랙과 슬랩을 통과하여 십자로 아래 움푹 패인 테라스의 피톤에서 확보한다.
둘째 마디(20m) 좌향 크랙을 레이백으로 7∼8m쯤 오른 후 오른쪽 벽의 볼트에 확보한다. 이후 돌출된 혹점에서부터 넓어지는 크랙을 손과 어깨를 마찰하여 오른다. 이곳은 과감하게 왼쪽 슬랩으로 나와서 오를 수도 있다. 크랙이 끝나면 오른쪽의 테라스로 진입하여 확보한다.
셋째 마디(20m) 볼트로 연결된 트래버스 구간으로 바위턱에 매달려 출발하면 자세가 편하다. 과거에 설치된 하켄 외에 5개의 볼트가 새로 설치되어있다. 마지막 볼트에선 오른쪽 밑의 스탠스가 좋은 곳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볼트로 올라설 수도 있고 직접 건널 수도 있다. 이 구간은 난이도보다 고도감이 심하다.
넷째 마디(28m) 남면을 가로지르는 밴드를 따라 우측으로 트래버스해 간다. 동양길과 하늘길이 교차되는 구간이지만 정확한 길은 밴드의 선이 끝나는 곳까지 나가는 것이다.
다섯째 마디(40m) 오른쪽으로 나간 다음 크랙으로 진입한다. 이 크랙은 정상 밑의 나무가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긴 크랙으로 크로니길과 동일한 구간이다. V자형 벙어리 크랙이지만 경사는 심하지 않다. 왼손과 왼발은 크랙에 잼하고 오른발은 슬랩의 마찰로 오르면 편하다. 크랙이 끝나면 침니 아래 나무를 이용해 확보하며 왼쪽의 하늘길 슬랩으로 올라서기도 한다.
여섯째 마디(20m) 넓은 침니의 좋은 홀드를 이용해 걸어 오른 후 잡목지대를 통과하여 정상으로 오른다. 한마디를 더 등반하기 위해 하늘길을 지나 정상에 오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