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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수봉 B코스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53

○인수봉 B코스○

 

 

 

- 길을 열어준 선배에 대한 예의 

 

 ◇ 아직도 어깨 확보가 편한 전담 씨(오른쪽)와 아내를 올려보내는 유학재 씨의 여유가 바위가 편한 곳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김정태. 한국의 산악운동 역사에서 초기의 등반가 한 사람을 꼽아야 한다면 먼저 그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선구자의 공은 때론 사회적 지위나 성공여부 조차도 그 뒤에 가려지기 마련이다. 그의 사생활이 불운했었고 말년이 어려웠다는 사실로 그의 업적이 폄하 된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등반가의 생활을 일반적인 잣대로 평가해보면 그처럼 불쌍하고 한심한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생산적이라기보다 노는 일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1935년 3월. 약관 20세의 나이로 김정태는 순수한 등반 목적을 갖고 한국인으로는 처음 인수봉에 올랐다. 그 길이 전면에 처음 열린 B코스다. 그 등반이 후일 한국 등반사의 귀중한 초석이 될 것인지 알았는지는 확인할 바 없다. 그러나 그날 김정태 씨와 엄흥섭(백령회 리더 엄흥섭과 동명이인) 그리고 김금봉과 이시이로 불리는 일본인 등 네 사람은 분명 한국의 등반이 본 궤도에 오르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다.영국인 외교관이었던 아처가 1926년 5월에 북면으로 인수봉을 처음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기록상이라는 단서를 달아야 옳다.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 씨의 부친 이해문 씨의 말에 의하면 1924년 봄 인수봉 정상에서 사람이 쌓아올린 돌탑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아처 역시 이미 인수봉에 오르기 전에 정상에 오른 사람을 목격했다는 기록도 있다.김정태 씨는 1916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1929년에 백운대를 처음 오른 것을 시작으로 20세가 되는 1935년엔 인수봉 정면벽 초등반, 1937년엔 노적봉과 선인봉 초등반을 해냈고 ‘백령회’라는 이름으로 산악운동을 전개하여 금강산의 암벽과 스키등반. 백두산 지역의 초등반을 일구어냈다.

 

1945년엔 백령회원들과 문화계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산악회를 창립하는데 실무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이후 국토구명 사업을 통한 산악운동을 벌였고 1976년 ‘등산 50년’을 발간하기까지 한국산악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사람이다.그때의 동료들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는데 1988년 73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이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 1935년 김정태 씨가 초등반

90년대 초에 한국산악회 50년사 자료 수집차 대관령의 스키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김정태 씨가 남긴 수첩이 보관되어 있었다. 빼곡이 적힌 그의 50여 권의 산행일지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지만 자식들의 등록금과 끼니를 걱정하며 지내던 말년의 기록은 가슴이 아파 더 읽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산에 다닌 것이 후회가 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더욱 가슴을 아릿하게 했다. 얼마 전 백수 처럼 평일에 가는 산 친구들과 ‘산 백수’의 원조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 해 한 적이 있었다.


시대를 풍미한 산 선배들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지만 우린 당연히 그의 이름을 거론했었다. 그의 행적에 결함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무능한 삶이었더라도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그리고 무수하게 많은 상 가운데 그의 이름을 딴 상이 하나쯤 만들어져도 좋지 않을까 하고.오늘 B코스 등반은 백수 선배의 행적을 더듬는 일이지만 같이 한 일행들은 나름대로 성공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다.이들의 면면을 짚어보자. 전담 씨는 1948년 가을 한국산악회의 김정태·주형렬·변완철·김정호·현기창·채숙 등이 실기와 이론을 지도하는 록 클라이밍 강습회를 통해서 인수봉을 쫓아 오른다.


당시의 참가 인원이 47명이나 되었으니 그 열기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수봉 등반 이후 전담 씨는 한국산악회에 젊은 기운을 불어넣는데 핵심이 된다.1969년도 해외 원정 훈련대에 등반대장을 지낸 것은 물론 샤모니 국립 스키 등산학교 유학 때에도 파견대장을 지냈으며, 70년대에는 KCC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결집시켰던 장본인이다. 인수봉의 B코스가 김정태 씨의 손에 의해 초등반이 이루어진 것과 대조적으로 선인봉의 B코스는 1956년 전담 씨의 손에 의해 초등반이 되었다.김정태의 인수봉 정면벽 초등반을 말할 때 전담 씨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토요일 오후 2시쯤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만나는 거야.”“백운암에서 자고 바우를 하니까 빠르거덩.”“바우 끝나면 눈이 쑥 들어가고 내려오자마자 배가 고파 ‘밥밥밥’ 했지.”“지금은 아파트 천지인 저 벌판이 식량 창고였어.”“쉬는 척하며 밭에서 무 배추 쑥쑥 뽑아서 담아왔지.”
돈암동을 지나 미아리 고개에서 시작되는 비포장 길을 터벅터벅 넘던 시절. 지나가는 트럭을 만나면 이때다 하고 올라타도 버스 기사는 알고도 내버려두었던 때부터 그는 그렇게 산에 올랐다. 우이동으로 오르는 길이 너무 멀어서 정릉길을 지나 보국문을 거쳐서 백운암에 이르기 전에 이미 깜깜한 오밤중이 되기 일쑤였다.

 

랜턴은 물론 양초도 귀한 때라 칠흑 같은 어둠을 더듬어 백운암에 올랐다.인수봉에 등반 루트는 오로지 A와 B코스뿐이었고 정상에 오르면 우이동과 창동 일대에 황금물결이 펼쳐졌다. 그때의 느낌은 적막과 고요였다.지금도 전담 씨는 서해 바다로 떨어지던 맑고도 붉은 황혼을 또렷이 기억한다. 가난한 산꾼들의 서정성은 그렇게 저 아래 세상에선 느낄 수 없는 산행에서 주어진 것이다. 산에서 줄창 술을 퍼대는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비워낸 마음에 담아야 했던 그 무엇이 아닐까.

 ◇ B코스의 셋째마디 크랙을 레이백으로 오르는 유학재 씨. 예전엔 크랙 중간에 나무가 있어서 손잡이로 이용했으나 지금은 밑둥만 남아 하켄처럼 박혀있다.


-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소나무

전담 씨에 비한다면 새카만 후배인 유학재 씨 역시 가장 최근까지 한국산악회의 주축을 이루는 등반에 선봉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한국산악회 파키스탄의 가셔브룸4봉 등반대(대장 조성대)에 참가하여 방정호·김동관과 함께 코리안 루트를 뚫었던 사람이다.
그 외에도 오늘의 손님들 모두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다. 코베아의 사장이며 인수봉 산천지길의 개척자인 김동숙 씨.디스커버리 인공홀드 제작자인 민경원 씨. 그리고 이들의 초청을 받아 인수봉에 오르게 된 일본인 고이찌 에자끼 씨는 일본북해도 산악연맹의 현직 부회장이다.


그리고 또 홍일점인 유학재 씨의 부인 박현우 씨는 한국여성산악회의 공동대표를 맡을 만큼 맹렬 산꾼이다. B코스에 대한 서설은 인수봉에 길을 열어준 선배에 대한 예의라 쳐도 좋으리라.껌처럼 쩍쩍 달라붙는 암벽화의 출현으로 발로만 오르는 가벼운 행세의 산꾼을 대슬랩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암릉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인수봉을 어렵지 않게 생각게 된 요즘이다. 전담 씨는 단독등반에 사용하는 솔로이스트에 줄을 통과시키고 등반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그것은 마치 힘이 닿는 한 등반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였다. 대슬랩 앞에 선 그가 먼저 선등을 해 나간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는다.


아직 그는 그럴만하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나이 들었다고 한풀 꺾인 사람들이 그의 몸놀림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자극을 받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그의 모습에 취해 있는 동안 모두가 무리 없이 크랙의 출발점에 모였다. 소나무 한 그루만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너무 오랜 세월을 산꾼들에게 휴식을 제공해 준 이 소나무는 살아있음을 버거워하는 느낌이 든다. 제법 성했던 가지의 일부는 잘려지고 밑둥은 닳아 없어지는 훼손을 묵묵히 견뎌온 것은 사라진 추억에 맞먹는 값을 갖는다. 둘째 마디의 크랙은 일명 항아리로 부르는 크랙이다. 요즘은 이 크랙을 레이백으로 뜯으며 신력으로 오르지만 전담 씨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왼쪽의 넓은 침니 모양의 크랙으로 올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항아리 크랙은 B코스의 배리에이션인 셈이다.


이곳을 지나면 디에드르 크랙이 시작되고 오른 쪽 옆에 설치된 쌍볼트에 서면 비로소 인수봉 동면의 경사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보턴을 누르면 길이가 길어지는 원통형 확보물을 주렁주렁 매단 유학재 씨가 넓은 크랙에 확보물을 끼워 넣느라고 시간을 지체한다.그는 줄곧 그렇게 장비를 시험하면서 오른다. 그러나 회수는 너무나 간단하다. 건드리면 빠지기 때문이다. “그냥 가!”
“무서워요”깡통 같은 그 물건들이 미덥지 않았던지 전담 씨가 말을 건네자 유학재 씨는 엄살로 응수한다. 맹렬 산꾼 박현우 씨가 아내의 입장이 되어 거든다.“우린 죽어도 보험액수가 적어서 그냥 가면 안돼요. 그냥 살려 가지구 써먹는 게 이익이에요.”“지자는 낙하고 인자는 수한다지요?” 크랙과 스태밍 자세가 섞인 곳을 오르면 시야가 터지는 밖으로 머리가 나오게 된다.


이 곳에서 길은 왼쪽의 용발 자국처럼 움푹 패인 바위를 건너게 되는데, 오른쪽 벽의 갈비뼈처럼 사이가 벌어진 구멍으로 슬링을 넣어 확보점을 만드는 것이 이 곳을 안전하게 지나는 방법이다. 여기를 통과하면 사실상의 등반은 끝이 난다. 나머지 구간이 부담이 되지는 않지만 100여m나 되는 긴 구간이다.중간의 바위 턱에서 한 마디를 끊고 디에드르 형태의 크랙을 따라 오르다가 바위턱을 넘어서 슬랩으로 이어지는 길이 50m 자일 한 동이 다 풀려간다. 이 곳은 크랙을 끝까지 올라 마지막 부분을 마등으로 오르던 곳이다. 인수봉을 오를 때 등반이 끝나도 끝났다고 말하면 실수다. 마지막 계란바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만에 하나 미끄러지면 왼쪽 방향으로 엄청나게 긴 추락을 유발할 수 있다. 짧지만 반드시 등반을 한 후 줄을 이용해서 오르는 게 상책이고 또한 재미다.정상에 오르자 낯익은 얼굴이 인사를 건넨다. 지난 여름 인사동 ‘로마네꽁띠’에서 박인식 씨와 함께 자리를 했던 유시건 씨다.
근무처가 정신문화연구소였던 그와의 만남은 뜻밖이었다. 그는 목요일에 고독의 길을 친구들과 즐겨 오른다는 나의 말을 듣고 세 번씩이나 왔었다고 한다.그런데 오늘 비로소 만나게 된 것이다. 뜻밖의 만남인데도 모두들 그에게 호의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이런 예상된 만남을 준비라도 한 듯 논어의 구절을 빌어 인수봉 정상의 만남에 축복을 내린다.“지자는 낙하고 인자는 수 한다지요?”

 ◇ 등반길잡이 개념도-인수봉 B코스


- 등반길잡이

B코스는 기록상 처음으로 한국인이 인수봉에 오른 등반 루트이며, 전면 벽에 처음 열린 바윗길이다. 초등반에는 김정태 씨와 엄흥섭(백령회 리더인 엄흥섭과 동명이인) 그리고 김금봉과 일본인 이시이도 동참했다. 첫 마디는 지금의 대습랩을 통하지 않고 왼쪽의 30m 직상크랙으로 올랐다.10개의 하켄을 갖고 올랐으나 단 하나의 하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어렵지 않게 오른 것으로 생각된다. 총 등반 시간은 5시간이 걸렸으며 하산은 후면으로 하지 않고 정면으로 되돌아 내려왔다.그 때 두 줄로 압자일렌 하면서 지금의 슬랩 등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한다.B코스의 등반 난이도는 셋째 마디의 크랙이 5.8로 매겨져있다. 비교적 어렵지 않아서 인수봉 첫 경험에 많이 오르는 곳이지만. 크랙에 낀 발이 아파서 난이도보다는 괴로움이 따르는 곳이다.

- 첫 마디(40m 또는 100m)
첫 마디에서 둘째 마디에 이르는 길은 30m 직상 크랙과 대슬랩을 통하는 두 가지 길로 오를 수 있다. 선이 여럿 겹쳐진 30m 크랙은 재밍과 레이백을 이용한다.
크로니길의 둘째 마디 종료 지점도 이 곳을 같이 사용한다. 대슬랩은 100여m에 달하며 기존 슬랩인 중앙의 슬랩과 조금 더 어려운 왼쪽의 슬랩으로 세 번쯤 끊어서 오른다.

- 둘째 마디(35m)
완경사의 디에드르 또는 짧은 슬랩을 지나 홀드와 스탠스가 풍부한 복잡한 바위에 붙는다.오른쪽 벽에 박힌 볼트를 이용해 확보하고 크고 좋지만 복잡한 바위를 넘는다.
복잡한 바위는 약간 불안정하지만 잡을 곳도 큼직하고 디딜 곳이 많다.

- 셋째 마디(30m)
주먹과 발이 들어가고 남을 정도의 크랙을 레이백과 재밍으로 오른다. 오를수록 벽이 넓어지고 크랙은 좁아지면 발이 아프기 때문에 침니 자세를 가미해서 오를 수도 있다.
왼쪽 벽의 쌍볼트나 위쪽의 굵은 소나무에 확보한다.

- 넷째 마디(25m)
넓고 쉬운 크랙을 오른 후 왼쪽으로 용발자국을 연상케하는 밴드를 트래버스하여 쌍볼트에서 확보한다.

- 다섯 마디(70m)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잡목과 바위지대를 넓게 퍼지는 완경사의 크랙을 따라 오른다.
중간에 마디를 끊을만한 장소가 좋지 않아 그대로 오를 경우 턱이진 바위를 우회하여 오른다. 우회하지 않을 경우엔 계속 직상하여 마디를 끊은 다음 20여m를 더 등반해야 한다. 이 곳은 언더홀드를 이용하여 마등을 한 후 오른쪽의 슬랩을 건너간다.
등반은 이곳에서 마치고 걸어서 오른다. 정상 밑의 짧은 슬랩을 올라야 모든 등반이 끝난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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