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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수봉 서측면 오버행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51

○인수봉 서측면 오버행○

 



 ◇ 오버행의 마지막 부분을 넘고 있는 오홍민 씨를 김종민·김재웅 씨가 확보하고 있다.


봄이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비가 개인 날, 초록의 향연에 들떠 덕성여대 천변을 따라 우이동을 향해 걸었다. 물이 불어난 냇물에 물고기 노니는 것이 무척 새롭게 느껴진다. 오늘처럼 무위한 일이 무료하지 않을 때 백수처럼 사는 일에도 보람이 있음을 깨닫는다.
개발바람이 수 없이 지나갔어도 새집을 짓지 못한 달동네 풍의 가옥들이 이곳엔 아직 남아 있다. 그곳에서 보는 첩첩산중의 인수봉은 하루재에서 드는 벽력같은 느낌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그런 조망의 권리는 그 자리를 지키고 살아온 사람들이 누리는 당연한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산이 낯설지 않은 산꾼들처럼 이 동네 아이들은 우이동이 산 좋고 물 맑은 곳이었다는 추억을 갖지 않을까.


북한산이 멀고 길었던 때인 1960년 가을, 한양대학교 산악부는 참으로 굵직한 선을 인수봉과 도봉산에 하나씩 그었다. 그중 하나는 산악부의 이름으로 행해진 인수봉 서측면의 오버행이며 또 하나는 선우중옥 씨의 주도로 이루어진 도봉산의 박쥐코스다. 이 두 등반은 모두 각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등반이었다. 박쥐코스는 당시로는 시도하기 쉽지 않은 첫눈 오름 방식을 취한 것이고, 오버행길은 처음으로 90。가 넘는 벽을 본격 인공등반으로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장비의 부재로 자유등반이 가능한 데만 올라야 했던 이전의 등반과는 다른 것이며 외국의 사조에 영향 받지 않은 점이 주목할 만하다.

 ◇ 오버행의 중간 부분을 오르는 김종민 씨. 후배들의 등반이 좀더 매끄럽길 바라는 그 역시 오랜만에 붙어보는 길이 쉽지 않은 표정이다.


- ‘엘라떼’들은 노래를 사랑한다.

오늘 함께 한, 개척자의 한사람인 송규호 씨는 선우중옥 씨와 동기생이며 친구다. 두사람 모두가 선구적인 일을 한 것도 흥미롭지만 재학생들이 아버지뻘 되는 선배와 자일을 묶는다는 것도 이채로운 일이다. 나이로 따지면 20년이나 후배인 이상세 씨와 김종민 씨가 개척자와 재학생들과의 등반을 주선코자 모처럼 등장했다. 이들 역시 한양대 산악부에 몸담은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선후배 지간이다. 토요일 아침, 오버행 밑은 아직 해가 들지 않아 선선하고 조용하다. 하강 길에 사람들이 내려오기 전에 등반을 끝내야 하기에 등반은 지체할 수 없다.  “엘라떼.”  아직 인수봉 비박에서 내려오지 않은 후배들을 구호로 불러본다. ‘엘라떼’는 종달새란 뜻의 불란서 동요의 후렴이다.


그 구호처럼 한양대 산악부는 노래를 즐기고 사랑한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본 나로서는 이 구호가 낯설지 않다. 막내인 재학생들이 내려왔다. 졸음 끝이 남아 있는 얼굴들이다. 오늘의 선등자 오홍민은 한양대 96학번으로 재학생 중 최고참이다.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이 첫 눈에 느껴진다. 후배 김재웅이 그의 확보를 맡아야 하지만 이름도 예쁜 김희은과 고은애는 오늘은 관전자일 뿐이다. 후배들의 등반을 지켜보려 했던 송규호 씨는 오버행의 아랫부분까지 함께 오를 것을 권하는 제의를 거절하지 않는다. 바위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양대학교 산악회는 5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에 걸맞게 그 층이 너무 두터워서 그 누구를 지칭한다는 것이 송구할 뿐이다.


이상세와 김종민 씨는 산악부가 일찍이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한양대학교 산악회 50년사>까지 발간한 빛나는 업적에 걸맞게 산악회의 새로운 전성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김종민 씨는 1992년 한양대학교 가네쉬히말 원정 때 등반대장을 맡았으며 요세미티를 등반한 경력이 있다. 이상세 씨는 1985년 요세미티 원정에서 선배인 이영순 씨와 함께 트리플 다이렉트를 올랐다. 그리고 2년 후 또 다시 맥킨리 원정을 추진하였으나 시즌이 맞지 않아 요세미티의 하프돔을 등반하던 중 낙석사고로 대장인 이영순 씨를 잃고 귀국한다. 그때 그의 꿈은 주춤하고 만다. 바늘과 실처럼 늘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그 또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 책상에 붙은 앵글로 하켄을 만들다

1960년 9월 초순, 새로운 코스의 개척을 위해 눈독을 들여온 산악부의 골수들은 인수봉의 후면 오버행에 눈길이 머물렀다. 당시 개척등반의 주축이었던 변용관·이영화 씨와 고 정병선·고 이경천 씨는 대학 2년생이었으며 송규호 씨는 1학년이었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이 얼마나 의기투합했는가는 장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장비는 35m 군용 자일이 두 동, 3단 줄사다리 2조, 카라비너 12개, 해머 1개 그리고 40개에 달하는 하켄은 모두 제작품이었다. 당시 산악반장이었던 정재철 씨는 이 계획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처음엔 자일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병선 씨는 몇 차례나 그의 집을 찾아가서 설득했지만 등반은 결국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1960년 10월 중순경, 정병선·변용관·송규호 등은 몸과 마음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남의 시선을 피하여 평일을 택하는 등 심적 부담을 고려하였다. 정병선의 선등으로 첫 마디를 쉽게 오르며 덮개바위로 부르는 곳에 하켄을 설치하며 3시간만에 넷째 마디인 오버행 아래까지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제일 어려운 다섯째 마디는 밑에서 보던 바와 달랐다. 완전한 오버행에다 생각보다 크랙이 5∼10cm 정도로 넓었다. 일차 등반은 그로써 종료되었고 즉시 장비 제작에 들어갔다. 솜씨 좋은 이경천이 박달나무와 보조 자일을 이용하여 줄사다리 2조를 만들었으며, 하켄은 정병선이 당시 예술관 건물 지층에 쌓여 있던 책걸상에 붙어 있는 앵글을 뜯어다 구공탄 불에 달구어 다듬고 볼트 구멍에 철사를 감아 독창적인 L자형 하켄 10개를 제작하였다.”

 

<한양대학교 산악회 50년사>엔 위와 같이 장비제작을 위해 못 쓰게 된 책걸상에 붙어 있는 앵글을 뜯어다 하켄을 만들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행동은 요세미테의 엘캐피탄 노즈 루트의 크랙인 스토브 레그를 돌파하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1958년 당시 개척자 워렌 하딩을 비롯한 3인조의 등반대는 애매한 크랙에 설치할 장비가 없어서 난로 다리를 끼우는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난로 다리라는 뜻인 스토브 레그라는 이름은 그러한 이유로 지어졌다. “글쎄 그때 우린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었어요….” “외국의 등반사조를 전해줄 매체도 없었고.” 그렇다면 인수봉의 오버행 크랙은 책상다리쯤이 되어도 시비할 것 없겠다. 산악회 전체 회원의 카라비너를 합쳐야 12개에 불과하며 군용 자일 두 동이 전부이던 점을 감안하면 그런 시도는 창작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오로지 오버행을 올라야 한다는 목표와 의지에 불타는 이들이 설사 책상과 걸상이 새 것이었다면 붙어 있는 쇠조각을 가만 놔두었을까. 10월 하순 다시 2차 등반이 시작되었고 정병선이 또 다시 선등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줄을 당길 땐 ‘앵커’, 늦추라는 사인은 ‘허’라는 구호를 사용했으며 두 줄을 사용하여 등반 한 일도 처음이다. 그리하여 3시간 여를 등반하며 씨름을 했으나 역시 L자형 하켄으로 오버행을 넘기는 쉽지 않았다. 하켄의 링 부분이 늘어나서 카라비너를 끼우기가 쉽지 않았고 박아 놓은 하켄이 헐거워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등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좀더 효율적인 V자형 하켄을 생각해내기에 이른다. 장비제작을 위해 또 다시 청계천 7가의 대장간에 찾아갔으나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제작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철도공작창 공장장으로 재직하던 송규호 씨 부친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들은 공대생답게 용도와 기능, 재질에 관한 시방서를 들고 찾아갔고 결국 시간 내에 3종류의 하켄 10개씩을 만들어냈다. 날씨가 청명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11월 초순, 용기백배하여 다시 3차 등반에 올랐다. 역시 정병선 씨의 선등으로 다섯째 마디를 다시 붙었다.
이번에는 변용관 씨 대신 이영화 씨가 합류했다. 새로 제작한 V형 하켄이 주효하긴 했으나, 마음을 졸이는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하켄의 간격도 30cm를 넘지 않게 촘촘히 박았으나, 카라비너가 부족해 계속 옮겨서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3차에 걸친 준비와 시도, 그리고 젊음의 투지 앞에 오버행은 결국 품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해가 기울어 석양빛이 깔리기 시작한 때였다. “그땐 망치소리가 산장까지 들렸어요. 이영구 씨 모친이 영험한 바위에 땅땅 망치질을 한다고 못된 사람들이라고 야단쳤지.


이영구 씨는 얼른 이 사람들이 꼭 필요한 못을 몇 개 박았을 뿐이라고 변명을 해 주었지요. 그래도 밥은 차려주었지. 밥을 얻어먹고, 깜깜한 밤중에 촛불을 신문지로 말아쥐고 하산했지.”
오랜만에 ‘밥값’을 했다는 표정이다  선배들의 명을 받아 오늘의 등반에 앞장을 선 오홍민과 김재웅은 처음 해 보는 등반이지만 침착하고 실수없이 무난하게 오버행을 넘는다. 그들의 등반을 지켜보는 송규호 씨는 그저 담담하다. 김종민 씨는 후배들의 줄처리가 좀더 매끄러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은 한양대산악부의 대를 이을 후배들이기 때문이다. 오버행길은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하강길에 있기도 하지만, 밸런스와 요령만 갖고 오르기엔 적지 않은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길은 무심히 지나치는 길이 되어가다가 1990년 여름, 미국의 주영 씨의 주선으로 모처럼 귀한 손님이 들었다.


1979년 캘리포니아의 중동부 슈거롭에 있는 ‘그랜드 일루젼’을 탄생시켜 세계의 등반 수준을 5.12에서 5.13의 세계로 끌어올린 토니 야니로Tony Yaniro가 바로 그 귀한 손님이었다.
세계적인 클라이머 야니로는 이날 서면 오버행을 완전하게 끝내지는 못했지만 등반을 해본 뒤 난이도를 5.13a/b 쯤으로 매겼다. 그가 만든 루트의 난이도가 5.13c 였기 때문에 한국의 토종바위에 그 이상의 그레이드를 준다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까. 그러나 2001년 7월에 오버행을 자유등반으로 오르는데 성공한 손정준 씨는 야니로와 다른 생각이다. 그는 오전 9시에 등반을 시작하여 레드포인트 방식으로 등반을 반복한 뒤, 오후 5시까지 크랙을 완전하게 등반하지 않고 상단의 경사가 완만해지는 곳에서 직상으로 올랐다. 그리고 5.13c 정도의 난이도를 매겨놓았다. 또한 크랙을 따라 완전하게 오른다면 5.13d 에서 5.14a 정도의 난이도가 나올 것이라고 추정했다.

 

태국의 프라낭 해벽에서 1999년에 한국 최초로 5.14의 세계를 경험한 그의 말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오늘날 개인의 등반능력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도 오버행 등반을 인공으로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마지막으로 확보물을 회수하며 오르는 이상세 씨가 연거푸 한숨을 푸푸 내쉰다. 바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선수답게 이상세 씨는 힘든 것을 극복하고 또 이겨내는 방법을 잘 안다. 예상대로 등반은 늦지 않게 마무리되고 저마다 오랜만에 ‘밥값’을 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 아래는 언제 왔는지 구인모 씨와 최혜향 씨가 등반에 빠진 후배들을 조용히 기다린다. 등반의 마무리를 지켜보는 송규호 씨의 얼굴엔 온화한 미소가 그득하다. 그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털어 넣자 문득 이상세 씨와 어제 먹다 남긴 족발이 떠오른다. 시장기가 돌기 시작한다. 밥값을 했다 치더라도 밥이 없으면 그 또한 소용없는 일. 산으로 인해서 넉넉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지만 배고픔이 깊어질 땐 그것도 소용없는 일. 산장 가는 한국사람의 배는 곱창이 순대가 되어야 편하다고 늘 주장하던 후배의 말이 오늘따라 실감이 난다.

 ◇ 서측 면 오버행 위치도


- 등반길잡이
하강길을 역으로 오른다. 인수봉 서측면 오버행은 인수봉 하강길을 역으로 오르는 바윗길이다. 출발점에서 셋째 마디까지는 5.7급이 넘지 않는 쉬운 길이며 확보 조건이 좋다. 넷째 마디의 오버행은 A3로 매겨진 크랙으로 출발지점을 제외하면 비교적 작은 홋수의 프렌드와 확보물을 필요로 한다. 전체 구간은 네 마디로 끊으면 적당하다. 그러나 다섯 마디로 끊어도 좋다. 초등 당시엔 여섯 부분으로 나눠 등반했다. 루트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지만 마지막 오버행을 넘으면 그 아래 확보자와 의사소통이 잘 안 되므로 밑에 남은 사람이 중계를 하면 좋다. 등반이 끝나면 그길로 하강할 수 있고 우측으로 내려와도 된다.


- 첫 마디 18m 짧은 오퍼지숀 크랙을 지나 슬랩으로 이어지는 길을 올라서 피톤에 확보한다.


- 둘째 마디 15m 바위에 덮개처럼 돌출된 날개를 잡고 오르는 쉬운 길이다.


- 셋째 마디 17m 오른쪽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오버행 밑까지 오른 후, 오른쪽으로 조금 지나 피톤에 확보한다.


- 넷째 마디 19m 오버행이 시작되는 크랙 밑까지는 네 개의 비스듬한 형태의 돌출부를 딛고 쉽게 건너 갈 수 있다. 이곳에서는 조금 넓은 크랙에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가 된다. 작은 홋수의 프렌드 10개 정도가 필요하며 크랙 중간의 벽에는 두 개의 확보용 볼트도 박혀 있다.크랙이 끝나는 부분엔 직경 3cm 쯤 되는 작고 둥근 피톤이 박혀 있다. 그곳을 지나 하강용 피톤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 다섯째 마디 14m 왼쪽 방향으로 난 크랙을 따라 오르면 등반이 끝난다. 크랙은 완만하고 어렵지 않지만 10m가 넘는 길이니 프렌드 한두 개쯤 설치하는 게 좋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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