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수봉 우정 B
○인수봉 우정 B○
- '만남'을 위해 무대에 다시 오르다
![]() |
◇ 대슬랩의 오른쪽으로 뻗은 우정슬랩을 오르는 권문상 씨. |
봄빛에 숨바꼭질하듯 나무 사이로 진달래와 벚꽃이 울긋불긋 피어난다. 이 계절에 마땅하고 당연한 개화지만 그 앞에선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을 가진 자라도 가슴을 열지 않을 수 없다. 산을 오르는 일이 체력단련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바로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정산악회와 함께 인수봉에 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꼽아보니 7년이 흘렀다. 오늘 만난 회원들은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버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정길의 개척자 박창규 씨는 이제 우이동 오는 길도 잘 모르겠다고 세월 탓을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팽팽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함께 둥반했던 김성태 씨, 우정산악회의 회장인 이월출 씨, 그리고 리더인 왕봉순 씨, 등반대장 권문상 씨와 송종만 씨, 가우리 상카의 원정대장이었던 박종수 씨, 76년도에 인수봉을 오른 이후 27년만에 안전벨트를 맨 홍일점 김옥란 씨, 30년 만에 다시 바위를 시작한 김경훈 씨 등. 모이고 보니 푸르고 혈기방장했던 청년들은 이제 모두 중년이다. 이들은 옛 친구와의 모임이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은 인수봉 무대에 ‘우정출연’이 아닌 ‘고정출연’을 위해 다시 왔다. 그래서 오늘 공연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만남’이다. 회원들은 저마다 즐거움이 넘친다.
이렇게 의욕에 찬 발길이 우정길에 다시 메아리 친 배경엔 몇 사람의 의기 투합이 깔려 있다. 사실 그동안 회원들의 부재로 우정길을 등반하자는 제의를 부담스러워 했던 이월출 회장이나 산악회의 속사정은 오래된 산악회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단체를 중시하는 분위기와 개인의 자유를 잘 조화시키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새로운 흐름을 이어줄 사람들은 신세대들이건만, 전통이라는 무거운 짐을 받들어 줄 듬직한 후배들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선배들은 그래서 아직 산을 떠날 수 없다. 햇살이 눈부신 인수봉의 동면엔 봄나들이 나온 클라이머들로 줄을 이었다. 길을 만든 주인들도 줄을 서서 오를 수밖에 없다. 그들 뒤를 따라 권문상 씨가 먼저 오른다. 그는 1980년대에 생산된 구형 RF암벽화를 신고 있는데 발 편한 그 신발을 보니 옛친구 생각이 절로 난다.
우정길은 우정슬랩이라 명명한 오른쪽의 대슬랩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 신발의 성능에 루트를 맞춘다면 과거보다 쉬워진 슬랩의 하단부를 생략하고 오아시스로 빨리 오르는 것이 어쩌면 요즘 더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김경훈 씨가 능숙하게 오르고 이어서 박창규 씨가 바위에 붙자 곧바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어휴! 이거 쎈데.” “형님이 초등한 건데요?” “30년 만에 융기작용이 일어났나?” 뒷파티를 리드하는 김성태 씨 뒤로 왕봉순 씨가 오르며 외친다. “야! 이거 신발이 껌이구먼!” 우정길에 사람이 많으면 공사중이라는 팻말을 들고 오르는 게 어떨까 궁리했다는 그는 새로 산 암벽화가 바위에 쩍쩍 붙는 걸 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그러나 박창규 씨는 요즘 신발이 불편하다.
일 못하는 사람이 연장 탓한다지만 연장이 너무 좋아도 탈이다. 비포장 길에서 성능 좋은 경기용 스포츠카가 무용지물이듯 기존 루트에 너무 감각적인 신발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다. 그는 신발뿐 아니라 여럿이 매달려 있는 피톤도 불안한가 보다. 그런데 정작 피톤을 박은 사람이 본인이니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이렇듯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고 바위에 오르는데 바람을 잡은 이는 김경훈 씨였다. 그는 군대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하던 1973년에 이미 바위를 떠났다. 그때 바위를 새로 시작했어도 지금쯤 고참소리를 듣고도 남음이 있을 터이다.
20대에 산에 빠진 사람은 무조건 사귀어도 좋지만,
30대가 되어도 산에 다니고 있다면 결혼상대자로 꼽지말라는 설을 실천하려는 듯 그는 산을 떠나 있는 동안 직장생활과 사업에 전념하여 성공한 사회인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츄어 골프 대회에도 나갈 정도로 나름대로 충실한 여가를 즐기며 살았다. 그러나 산을 생각하면 그것은 결국 외도였다고 실토한다. 그런 그가 다시 산을 찾는데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김용기 씨가 운영하는 등산학교를 찾아갔다. 변화된 장비사용법과 시스템을 그곳에서 다시 배웠다. 후배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가 보여준 진지함은 30년의 공백을 메우기에 충분했다.
![]() |
◇ 우정길의 마지막 넷째 마디를 오르는 김성태 씨. 13m쯤에 설치된 볼트를 지나서 마디가 끝나는 지점 사이에 물기가 있을 땐 애매해지는 곳이다. |
- 비에 젖은 손이 아직 뜨겁다
정면벽에 퍼지는 소리는 다소 시끄럽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니 그것은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소음이다. 오아시스를 지나 우정길 밑으로 오르자 줄을 선 팀들이 움직임이 없다. 영길을 오르는 팀에서 까다로운 곳을 통과한 선등자가 엉뚱한 곳에서 미끄러지자 오른쪽 옆의 의대길에서도 연쇄 추락이 일어난다. 우정길의 둘째 마디 크랙을 오르는 앞팀도 계속해서 슬립을 반복하니 분위기가 순간 썰렁해진다. 우정길의 주인들은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기다릴 뿐이다. 우정B 코스의 백미는 이곳 둘째 마디. 세 가지 방법으로 오를 수 있다. 중앙크랙을 통해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고 크랙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은 왼쪽 볼트길로 갈 수 있다.
초등 당시엔 오버행처럼 보이는 우측의 크랙에 5개의 하켄을 두들겨 박고 돌파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다. 이곳을 오를 때 손이 까지고 고생했던 초등자 박창규 씨는 처음 바위에 오르는 사람처럼 오히려 회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기는 어떻게 가면 편하지? 몇 미터나 되는가? 내가 그래도 옛날엔 명세컨이었어. 주봉 K크랙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받았고.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간 한덕정 씨 다음으로 잘한다는 소릴 들었지. 그런데 그 양반…, 강호기형은 지금 몇 살이지?” “엊그제 돌아가셨습니다.” “어잉….”
놀랍고 허탈한 일이지만 모든 이유를 일거에 정리해 주는 게 시간이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저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뿐.
처음 우정길은 A와 B로 나누어 개척이 되었다. A코스는 1969년 6월 15일에, B코스는 3일 후인 6월 18일에 완성을 보았다. 개척의 시작은 1965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림받은 듯한 암벽에 망원경을 통해 줄을 긋고 스케치를 하며 정찰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러나 1967년 초봄 설악산의 미답봉을 등반하던 중 박정규 씨가 추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없는 활동은 곧 정체를 의미했다. 결국 개척의 임무는 그의 동생 박창규 씨에게로 넘어갔고, 우정산악회는 정면벽에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박창규 씨는 강영택·이승균·신유균·한남수 씨와 파티를 이루어 5월 21일 등반을 시작한 후, 6월 15일 드디어 우정 A길 개척에 성공한다.
등반 지원조인 이준성·강대영·채영민·정충구·박태부·박찬훈 씨 등이 밀고 당긴 결과였다. 그리고 이틀 후 그 여세를 몰아 또다시 15m 오른쪽 크랙과 침니에 눈독을 들였다. 이번에는 박정규·박창규 형제가 나섰다. 이준성·정충구·전진호·차상규·김진호 씨가 지원을 맡았고 등반의 기술지도는 김태진·박정규·이건일 씨가 담당했다. 이렇듯 당시 인수봉의 길을 개척하는 일은 산악회 전체의 행사이자 울력이었다. 과거의 사회적 상황과 산악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등반 한다는 것은 용기와 끈기 없이는 어렵다. 당시의 가장 힘든 상황은 장비확보 문제였다. 당시 국가대표 빙상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정충구 씨는 일본에서 장비를 공수해오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개척 작업은 물론 우정의 결속력을 단단히 하는데 한 몫을 해냈다.
우정 B코스의 개척은 1969년 6월 17,18일 양일간에 이루어졌다. A코스 성공에 힘입어 여세를 몰은 덕이다. 첫날 박창규 씨는 첫 마디의 슬랩을 오르다가 두 번이나 미끄러졌는데 군용 워커를 신고 안전벨트도 없이 올랐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마디는 지금처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찢어진 크랙이나 왼쪽의 볼트길로 오르지 않고 가장 오른쪽의 크랙에 봉봉 하켄을 설치하며 돌파했다. 다음날 이곳을 오를 때 크랙엔 물이 흐르고 있어서 왼쪽의 볼트를 이용해서 올랐다. A길의 개척에 성공한 자신감으로 형제는 어느새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40m에 달하는 대침니를 오를 때는 36m짜리 자일이 다 풀려가도 줄이 모자라서 확보를 보던 정규 씨는 결국 손을 놓아야 했다. 뒤이어 쌍크랙이 남았으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다음날 도전하자는 형의 제의를 대학 2년생인 창규 씨는 자신있게 거절한다. 잠시 시간이 흘렀고 갈등은 서로 선등을 하겠다는 투지로 바뀌어 버렸다. 결국 창규 씨는 형의 허락을 받고 가슴이 화끈해 오는 것을 느꼈다. 날씨는 점점 악화되어 비와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벗겨지고 피가 흘러도 후회는 소용없는 일. 창규 씨는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크랙을 오른 후 나뭇가지를 잡았을 땐 칼로 벤 것처럼 손에 피가 흘렀다. 지금도 이곳은 마무리가 애매하지만 더구나 비오는 날에 워커를 신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침니를 끝낸 우정산악회원들은 이미 다 오른 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안다. 앞서가는 팀이 또 다시 정체를 보이자 김옥란 씨는 떡과 과일을 안주 삼아 복숭아술을 한잔씩 돌리기 시작한다. 왕봉순 리더의 손에도 어느새 양주 한 순배가 돌아가고 있다.
회원 많은 우정산악회와 술의 관계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1975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우정산악회 회장인 정충구 씨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간 일이 있다. 그때 내 옆자리엔 건장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있었다. 건배의 제창이 있을 때마다 컵에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던 그의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엔 원샷이란 용어가 생기기 전이었고 건배를 하면 꺾어서 마시는 법이 없었다. 더구나 선배들 앞에선 마음대로 일어날 수도 없다. 그날 물 마시듯 술을 퍼부었던 사람은 1980년에 처음으로 ‘태백산맥 종주’를 해낸 박승기 씨였다.
좋던 날씨는 오후가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얼마나 많은 산악인들이 이 4월에 급변하는 바람에 당했던가.
술과 음식은 더 이상 앞서 오르는 사람들을 기다린다는 핑계가 될 수 없다. 배낭을 추스려 정상에 오르니 햇빛엔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마지막을 마무리하며 뒤따라 오르는 송종만 씨의 모습에서 진공청소기라고 불리던 축구 선수가 생각났다. 라스트는 언제나 그렇게 정리를 잘하는 어머니 같은 사람의 몫이다. 우정길의 개척을 마무리하던 1969년 6월 18일 정규·창규 씨 형제는 비에 젖은 채 뜨겁게 손목을 잡으며 감격에 겨워했지만,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더 쉽고 안전하게 오른다. 그래서 어려움을 추구하는 기준은 높아만 가고 감동 받는 일에도 인색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소박한 일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 등반은 더 어려워지는 것일까. 인수봉을 찾는 산꾼들은 그래서 어제도 또 오늘도 고민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 어떻게 오를 지를.
-등반길잡이
인수봉 우정B 코스는 1969년 6월 17,18일 이틀 동안 박정규·박창규 씨 형제가 등반해 일명 형제길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의 구간은 대슬랩 상단부 오아시스까지 이어지는 두 마디의 슬랩을 제외한 네 마디 105m로 이루어져 있다. 난이도는 둘째 마디가 5.7~5.9로 매겨져 있고 나머지 첫 마디와 셋째 마디는 5.6, 넷째 마디는 5.7로 매겨져 있다. 등반이 끝난후 하강은 인수봉 후면으로 한다. 첫 마디 20m 슬랩과 짧은 잼 크랙을 오른 후 나무까지 올라 확보한다. 나무를 타고 앉아서 볼트에 확보한다. 둘째 마디 20m 나무에서 6∼7m쯤 올라 좌측의 밴드를 딛고 일어선 후 오른쪽 방향으로 뻗은 크랙을 따라 오른다.
크랙을 3∼4m쯤 오르면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3m쯤 오르고 나무를 지난 후 쌍볼트에 확보한다. 후등자는 이곳을 지날 때 나무 위로 갈 것인지 밑으로 갈 것인지 생각해 두고 오르는 것이 좋다. 셋째 마디 35m 어깨를 바위에 대고 발과 손을 바꾸어 가며 오르는 전형적인 침니 코스다. 벽에다 등을 기대지 않고 손과 발만을 바꾸어 가며 오를 수도 있으며 안으로 깊이 들어 갈수록 자세가 좁아지기 때문에 힘이 든다. 끝까지 오른 후엔 쓰러진 소나무를 이용하거나 단풍나무에 슬링을 걸고 확보를 한다. 넷째 마디 30m 쌍크랙을 재밍하여 오르다가 13m 지점에 설치 된 볼트에 확보하고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을 올라서 등반을 마친다. 정상까지는 잡목지대와 마지막 짧은 슬랩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