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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수봉 설교벽

행복한 사연 2008. 3. 31. 09:50

○인수봉 설교벽○

 


- 크로니들의 놀이터 눈 내린 한적한 성밖의 벽

 

 ◇ 슬랩에서 등반이 시작되는 설교벽 등반은 나무와 크랙이 많아서 등반선이 다양하게 이어진다.


아직도 산에 가야할 명분이 있다면 그것은 산 친구로 인해서 가능한 일이다. 옛일에 대한 회상은 곧 친구에 대한 기억이며 그 무대는 다름 아닌 산이다. 산이 곧 친구라는 등식은 크로니산악회에서 정답으로 매겨진다. 친구의 뜻을 지닌 크로니가 그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설교벽은 바로 그 친구들의 작품이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1971년도 11월 30일자 조선일보에는 인수봉 후면 오버행에서 하강하다가 7명이 동사한 산악사고 내용이 일면을 도배했다. 그것은 설교벽의 기록을 뒤지다가 우연히 보게 된 기사였다. 사고당시 구조작업의 지휘는 변완철씨가 맡았었다.


그 때까지 32년간 98명의 인명을 구조해낸 영원한 한국산악회의 구조대장이었던 그이가 그 날도 어김없이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신문기사 밑에 아주 작은 활자체의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 이름은 고 김항원. 바로 설교벽 개척의 주역이었다. 당시 김항원은 조난사한 사람들을 수습하기 위해 4명의 크로니 회원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하강 루트를 오르내리며 힘겨운 작업을 해냈다. 기자들은 그들의 희생적인 행동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 그의 행적을 찾아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옛 기록을 뒤지는 일은 무언가 손해 보는 느낌이 없지 않아서 꼼꼼히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반가운 기사를 발견하면 원래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엉뚱한 글을 읽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한 번 손에 잡으면 이제껏 널 기다렸다는 듯이 끌어당기며 결국 과거로 푹 빠뜨리고 만다. 1970년대는 산꾼들에게 희망의 연대였다. 인수봉과 선인봉의 기존 루트가 거의 개척된 것도 이때지만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은 해외 원정이 꿈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루트의 개척과 활로를 모색할 때 찾아낸 설교벽은 보물과도 같은 곳이었다.


김항원은 크로니의 회원들과 취나드 A코스를 오르다가 인수봉의 동북면으로 연결된 병풍같이 넓게 펴진 페이스를 발견한다. 그리고 저렇게 훌륭한 암벽을 발견하게 된 것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김경호와 최선웅씨 일행이 숨은벽을 개척한 것이 전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인수봉에도 숨겨진 바위가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었다. 김항원과 크로니 친구들은 개척 등반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인수봉에 때 이르게 흰눈이 내린 1970년 10월 24일 개척의 신호를 울렸다.

- 고 김항원씨가 개척 총지휘

설교벽은 인수봉에서 가장 은밀한 바윗길이다. 항상 인수봉의 그늘에 가려지는 북면에 있어 그늘벽이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런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크로니의 무대가 되면서 설교벽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김항원씨가 지었다는데 이견이 없다. 200여자가 넘는 교자 중에서 선택한 ‘교(郊)’자는 성밖의 교외를 뜻하는 말이다. 인수봉의 북면을 산성의 밖으로 본 것이다. 김항원씨는 에너지가 충만하며 예능에도 재질이 있었던 사람이다.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했으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하기도 했다. 1995년 4월 30일 작고하기 전해에는 설악산을 담은 기록영화로 이탈리아 샬레느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서예의 대가 여초 김응현에게 오랫동안 사사를 받을 정도로 한문에도 조예가 있었다. 박영배씨가 서예에 빠지게 된 것도 항원씨의 영향이다. 그런 그가 ‘눈 내린 한적한 성밖의 벽’이라는 서정적인 느낌의 이름을 지어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와 함께 개척 당시 대원이었던 김연호(뉴질랜드 거주)씨는 다음과 같이 그를 회고한다. “형은 참으로 신선한 리더였다. 일요일에 만나서 바위하고, 내려와서는 거창하게 술을 마셨다. 산에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길게 혹은 아예 밤을 세워 마시다 그래도 아쉬우면 그 다음날까지 하산주를 마시던 크로니 악동들에게, 항원형은 자연스런 술자리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형은 멋진 사람이었다.


누런 키슬링을 메고 줄지어 다니며 식민지 냄새를 풍기던 산사람들 사이에 멋있는 반바지에 윗통을 당당히 벗고 작은 배낭을 메고 나타나 최신 등산패션을 선보였다. 형이 있기에 크로니의 등산패션은 단연 압권이었다. 우리 시선에서 본다면 다른 명문산악회라는 친구들은 참으로 꾀죄죄(?)하고 냄새나는(?) 복장들뿐이었으니까. 어디 복장만 그랬나. 장비는 물론 여자친구들도 최고였다. 우리 인생에서 크로니를 뺀다면 얼마나 건조해질까. 형은 우리 젊은 날의 우상이었다. 크로니와 항원형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 제3코스의 중단부 크랙을 오르고 있는 김항원씨의 모습. 언제나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 70년 10월부터 1년간 8개 루트 개척

항원씨는 설교벽을 보물처럼 닦고 보듬기 시작했다. 설교벽을 직접 스케치도 해보고 코스마다 길이를 재고 확보물까지 설치하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등반대원은 원정대와 마찬가지로 진용을 갖추었다. 개척대원들은 A조에 안상갑 김연호 이승용, B조에 금창연 남순철 김태성, C조에 정명환 김정기 방만익으로 구성되었고 리더엔 김성국 그리고 김항원은 총 지휘를 담당하게 되며 지원조엔 김효숙 유인희 김철욱 이현식이 가세한다.
1970년 10월 24일, 설교벽 우측의 제1코스를 시작으로 11월 2일에서 4일까지 제2코스와 3코스, 11월 28일엔 제4코스까지 개척을 마치고 작업은 다시 이듬해 여름으로 넘어간다. 그리하여 제5코스가 1971년 8월 14일, 제6코스는 10월 3일, 제7코스와 8코스는 11월 7일에서 14일까지 총 8개의 루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설교벽에 올 때마다 궂은 날씨를 만나 취재는 어느덧 여름에서 늦가을로 넘어오고 말았는데 그토록 별렀던 오늘도 날씨는 신통치 않다. 좋은 날씨 만나는 것도 평소에 공덕을 많이 쌓아야 가능한 것이라니 불평도 함부로 할 처지가 아니다. “영배형! 가시죠.” “아니야. 창연이가 가야돼. 장본인이 가야지 누가 가냐.” “나도 너무 오래돼서 아리삼삼해요.” 창연씨는 개척 당시 등반 도중 떨어뜨린 봉봉하켄이 남순철씨의 이마에 맞아 지금까지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손해배상도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친구인 걸 보면 산이 법보다 우세한 것은 확실하다. “레더를 밟고 앞쪽으로 돌아서 떨어졌는데 죽는다는 생각은 안 들고 마치 70밀리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 한 20미터 떨어졌나? 어이쿠 했던 생각뿐이 안나. 그런데 항원형이 다시 끌고 올라갔어. ‘너 오늘 안 하면 다시는 바위 못한다’고 해서 우측으로 다시 올라갔지.


설교벽은 쫄따구땐 잘 안 갈라 그랬어요. 선배들 반찬투정부터 술 심부름. ‘빳따’도 많이 쳤지. 그 땐 내가 명색이 육군 중위였는데 산에 오면 졸병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래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창연씨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속속들이 선배들의 치부를 들추어낸다. 등반대장 김상일은 아이들 꼬드기듯 선배들을 바위로 밀어 넣으려 하는데 날씨 때문인지 서로들 등반을 사양한다. 오늘처럼 우중충한 날 후배들 올려놓고 소주판 벌이는 재미가 괜찮다는 걸 산전수전 겪은 선배들은 너무도 잘 안다. 이상하게도 이곳에만 오면 크로니 가족들은 내 집처럼 편안해 지는 모양이다. 결국 오늘의 등반은 가장 오르고 싶어하는 신참들과 그의 뒤를 지켜줄 김상일씨와 함께였다.

- 크로니, 우리만의 아지트

언젠가 바둑의 고수 서봉수가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다른 명인들처럼 해외에서 수업을 거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그를 ‘된장바둑’이라고 불렀다. 오늘 함께 오르는 크로니의 등반대장 김상일은 ‘된장바위’라고 불러주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하체가 가늘고 상체와 손가락의 힘은 무지하게 세야 하는 스포츠 클라이밍 형이 아닌 선천적으로 몸이 단단한 장사형이다. 기존 루트는 언제나 힘차게 오르기에 충분한 몸이다. 설교벽의 첫 마디는 부담스럽지 않은 슬랩이다. 모두들 성큼성큼 잘도 오른다. 그러나 언더 크랙에는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어서 망설임이 뒤따른다. 날씨가 차가워서 손을 호호 불어댄 다음에야 한차례씩 힘을 쓸 수 있다. 김상일씨에 이어 정근성 이시종 이건호 금창연씨까지 소나무로 잽싸게들 오른다.

 

그런데 다시 용환씨가 둘째 마디로 오르기 시작하자 선배들은 소주 생각들이 나는지 선수들만 놔두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난 취재한다고 해서 설교벽이 우리가 개척한 길인 줄 알았어요.” 뜻밖의 말을 상일씨가 한다. 등반대장인 그도 모를 정도로 크로니 식구들은 설교벽을 잊고 지냈다. 지금 우리가 오르는 길도 개척 당시에 1번으로 설정된 길인지 2번인지 혼동이 갈 정도다. 하지만 장택훈 회장은 그래서 회원들이 해야할 일을 정확히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등반이 끝나고 다시 이 길로 하강하기 위해서는 하강 피톤을 박을 자리를 생각해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설교벽은 재정비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은 꽤 귀찮은 작업이지만 소주보다 바위가 좋은 사람이 더 많아지는 때면 쉽게 해결이 될 것이다.크로니의 간판스타 유동옥씨는 설교벽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다.


그는 설교벽이 어떤 곳이었나를 다음과 같이 읊조리듯 기록해 두었다. ‘70년대 이곳은 crony 우리만의 아지트라고 생각했었다. 사실이 그러했었고. 손바닥만한 이곳 비탈진 베이스에는 주위의 굵은 나무들을 잘라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쳐놓아 장비걸이로 이용하기도 했고 엉덩이를 걸치는 의자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자리는 옛 그대로 있지만 케른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구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베이스캠프장에 사람 높이의 케른을 쌓아 놓아 이곳이 우리의 영역임을 표시해 놓았고 겨울에는 눈이 가슴 높이만큼이나 쌓여 있어 겨울산행 할 때에는 이곳에서 눈 장난도 많이 했고 춘사월까지도 눈이 녹지 않았던 추억 어린 곳이다.’ 그의 글 일부만으로도 설교벽은 크로니의 젊은 가슴에 어떤 추억을 새겨놓았는지 알 것 같다. 어쩌면 이곳은 더 이상 산에 오르기가 벅찰 때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눈시울이 젖어들게 되는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 울산바위를 떠올리게 하는 인수리지의 클라이머들. 설교벽과 인수리지의 연결 등반은 해외 원정등반의 훈련대상지로 많은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인수리지 통해 인수봉 정상 도착

잡풀이 많아서 손잡을 곳이 많은 둘째와 셋째마디가 끝나고 좌측으로 넘어가는 트래버스다. 용환씨가 상수리나무에 슬링을 걸고 확보한 후 5m쯤 올라 하켄에 줄을 걸고 좌측으로 건너간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우측에도 날렵한 수직 크랙이 있다. 그 속에 초등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하켄이 눈에 띈다. 그런데 과연 이 길로 완등을 했을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그 위엔 확보물의 흔적이 없다. “워디로 간 것이여?”  용환씨에 뒤이어 건너가는 근성씨가 침니 속으로 들어가며 난색을 표한다. 옛날바위를 할 필요가 없는 세대들이 침니와 크랙에 친하지 않은 것은 인공이라는 괴물 덕이다. 인공홀드는 당기고 밀고 비트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예술적 몸짓으로 만드는데 엄청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인공으로 크랙이나 침니까지 만들어서 종합예술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연암장에서는 위험과 모험이 차지하는 변수가 또 있다. 언제까지 이 불확실한 변수가 등반의 세계를 붙들고 갈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나태함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겠다. 설교벽은 이 트래버스와 침니를 빠져나오면 간단히 끝난다. 이곳에서 인수리지를 통해서 정상으로 가는 것은 선택사항이다. 우리는 저 아래 넘실대는 소주의 유혹을 포기하고 정상으로 향했다. 크랙을 넘고 나면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고도감이 삼삼한 울산암리지처럼 시원스런 조망이 열리는 길이다.

 

어느덧 시야가 흐려지고 등반은 인수봉 정상에 선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곳에 서서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직까지도 바위가 좋다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밤, 바람을 뚫고 우리는 다시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크로니는 우리 기수하고 또 박영배 유동옥 이런 구세대가 빠져야 발전해!”  “아! 후배들에게 참견할 게 뭐 있어.”  “내가 먼저 총대를 메겠어.”  먼저 하산해서 막걸리가 거나해진 창연씨가 선배들만 함께 자폭하자는 말에 박영배씨는 빙그레 웃음으로 화답할 뿐이다. 과감하게 선배가 물러나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두 걸음쯤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닌가. 저렇게 격의 없는 선배들이 그 옛날 ‘빳따’를 어떻게 쳤을까. 아! 다행이다.

 

 저 선배들에게 두들겨 맞지 않고 막걸리를 마실 수 있어서… 설교벽은 1970년 10월 24일부터 그 이듬해 11월 14일까지 일년의 작업 끝에 총 8개의 루트가 개척되었다. 당시엔 루트를 개척하고 보고서를 내며 개념도까지 작성되었지만 한두 개 루트를 제외하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루트를 찾아 오르기가 쉽지 않다. 1번과 2번 코스가 비교적 접근과 등반이 용이하다. 암벽으로의 접근은 인수산장 아래의 육모정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인수봉의 북면으로 방향을 잡아 오른다. 접근로는 낙엽이 길을 덮으면 크로니 회원들도 매번 같은 길로 가지 못할 만큼 애매하다. 하지만 정확한 방향만 잡아 오르면 설교벽 출발 지점인 슬랩까지 20여분에 갈 수 있다.

●첫마디
완만한 경사의 슬랩을 오르다가 우향 언더크랙이 시작되는 부분의 볼트에 확보한다. 이곳에서 마디를 끊을 수도 있지만 계속되는 언더크랙을 넘어 소나무까지 오르면 50m가 넘는 길이다. 크랙의 아랫부분에는 확보용 나이프 하켄이 있고 윗부분에도 3개 설치되어있다.

●둘째마디
흙이 섞인 길을 따라 좌측으로 10m쯤 이동한 후 잡목이 이어져있는 크랙을 따라 직상한다. 약 45m쯤 오르다가 나무에 줄을 걸고 후등자를 확보한다.

●셋째마디
둘째마디의 길이 10m 이상 더 이어지며 크랙은 다시 넓어져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이곳에서 넷째마디로 오르기 위해서는 나무가 많은 넓은 길을 약 10m쯤 걸어서 오른다.

●넷째마디
확보지점인 나무에서 5m쯤 위에 박혀 있는 하켄에 확보하고 좌측으로 10여m쯤 줄을 이용해서 볼트까지 트래버스한다. 이 구간은 자유등반도 가능하지만 끝부분에서 세밀한 밸런스가 요구된다.

●다섯째마디
좌측방향으로 두 스텝쯤 올라서 우향 레이백 크랙을 잡고 3m쯤 오르다가 왼쪽 페이스로 떨어진다. 이곳에서 구형 볼트에 확보하고 다시 왼쪽 아래로 내려선 후 반 침니로 진입하여 끝까지 올라 나무에 확보한다. 침니의 길이는 약 13m쯤 되며 둥근 모양의 촉스톤이 박혀있다. 등반은 안으로 몸이 들어가서 할 수도 있고 밖으로 빠져서 양손과 양발을 벽에 붙이고 오를 수도 있다. 침니가 끝나는 곳에서 등반이 종료된다.
하강은 이곳에서 나무에 줄을 걸고 할 수도 있고 인수리지를 통해서 인수봉 정상까지 오를 수도 있다.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글쓴이 : 산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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