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수봉 거룡길
○인수봉 거룡길○
- 용의 등줄기에 묻어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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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봉 남면을 휘감아 도는 거룡길 첫 마디를 등반하고 있는 박희영과 장봉완(아래)씨. |
토요일을 노려 거룡길 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엔 먼저 온 임자들이 있었다. 예전처럼 손님이 뜸할 걸로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그들을 붙잡을 수는 없고, 새치기도 그렇다. 어찌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순간 일행 중 한 명이 인사를 건넨다. 돌아보니 6주 동안 한솥밥 먹던 코오롱등산학교 동문이다. 우리의 사정을 알았는지 슬그머니 하늘길 쪽으로 내려간다. 검게 그을린 얼굴의 장봉완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김제훈씨가 우선권을 넘겨 준 그들 뒤로 속삭였다. “개척은 우리가 하긴 했지만 주인은 아니지요.” 젊은 날의 열정을 다 쏟았던 인수봉에서 배운 것 중 아직 버릴 수 없는 게 있다면 등반윤리와 질서다.
그리고 이론적으론 잘 알지만 실천은 힘든 겸손도 빼놓을 수 없다. 거룡길은 예나 지금이나 클라이머들의 발길이 뜸하다.
산천은 물론 인걸마저 의구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건만 아직 그 길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터덜터덜 내려오는 길에 거룡길 밴드에 붙은 사람을 보면 ‘음, 오랜만에 손님 들었군’ 하고 눈길을 주던 곳이다. “점심은 중간에 가다가 먹자구. 이 나이에 굶어가면서 바위 하냐?” “그럼 봉완이 형이 톱이야?” “아니야, 말려야 돼.” 한 5년 넘게 바위를 떠나 있었다는 박희영이 첫 마디 레이백 크랙을 성큼 오른다. 그는 혹시 오늘 장봉완씨가 선등을 하지 않을까 하고 긴장했었다. 5척 단신 박희영은 아직 고무줄 같이 탱탱한 근육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첫 마디 크랙을 지나 구멍 홀드를 통과하는 일은 역시 키가 작아 불리하다. 두 차례나 꺾는 동작에 실패한다.
잠시 휴식 끝에 구멍에 발을 넣고 일어서는데 성공하여 꿈틀대는 거룡의 등으로 올라탄다.
장봉완씨가 두 번째로 줄을 묶는다. “야 제훈아, 옛날에 우리 이렇게 간 거 맞냐?”“맞겠지….”
작은 홀드 하나조차도 훤히 외우고 있을 그의 몸은 ‘배 클럽’이라고 자조하는 산 친구들과는 사뭇 다르지만 날 듯한 몸은 아니다. 강력한 파워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힘을 안배하는 노련함만큼은 버젓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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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크랙을 등반하고 있는 장봉완·전재운·김제훈씨. |
- 먼저 간 악우의 추억
인수봉이 바라다 보이는 능선에는 저마다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는 비석들이 곳곳에 있다. 대부분 산에서 죽어간 젊은 청년들의 넋이다. 그 가운데 전재운의 비석도 섞여있다.
그는 장봉완·김제훈과 함께 거룡길을 만든 장본인이다. 종로거리에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이 흘러나오던 시절, 전재운은 통기타에 ‘You are the reason’이란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의 감성은 거룡길을 개척하며 의기투합한 산친구 장봉완·김제훈과 시대를 같이한다. 전재운은 활달하고 사교적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한국등산학교 강사로 활동했으며 대한산악연맹의 77에베레스트 원정대 훈련대원으로 선발될 만큼 탁월했다. 설악산 훈련등반에서 전재운은 최수남 조장이 이끄는 제1조의 대원이었다. 최수남은 1971년도 로체샤르 원정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8000m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단연 선봉장이었다. 전재운은 1976년 2월 15일 김호진·송준송·박훈규·이기용 등과 함께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설악골의 좌측골, 공룡능선상의 1275봉 안부인 제1캠프로 진출했다. 그날 밤 훈련본부에서는 폭설에 의한 눈사태를 예측하고 전 훈련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무전기가 귀할 때라 제1조는 철수 명령을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적설량이 1m 이상 쌓인 상황에서 야영지를 출발했다. 깔때기처럼 생긴 깊은 계곡은 적설량이 많을 경우 자연발생적인 눈사태가 종종 발생하기 마련이다. 피해갈 수 없는 하산길. 까치골을 통과하다가 드디어 걱정하던 눈사태가 덮쳤다. 그로 인해 6명의 대원 모두가 매몰되었고 김호진·박훈규·이기용은 살아났으나 안타깝게도 최수남·송준송·전재운은 사망하고 말았다.
전재운이 설악산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장봉완은 마침 군에서 휴가 중이었다. 얼핏 방송으로 전해진 설악산 훈련대의 사고 소식이 장봉완의 귀를 스쳐갔다. 그는 즉시 설악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 난 뒤였고 남은 것은 사후 처리였다. 전재운의 시신 앞에는 장봉완과 가족뿐이었다. 동숭동에서 노제를 지내고 벽제로 가서 화장하여 가족들과 함께 유골을 빻았다. 그런데 도대체 이 유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던 중 북한산이 생각났다.
우선 유골을 잠시 우이산장에 안치했다. 친구의 주검을 받아준 우이산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생전에 전재운이 그토록 사랑한 인수봉이 보이는 깔딱고개에 올라 유골을 묻었다. 장봉완의 휴가 15일은 그렇게 친구를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일에 고스란히 바쳐졌다.
한동안 장봉완은 전재운을 그리워하거나 혹은 그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심정을 누를 수 없었으리라.“이제 재운이를 떠나야지요….” 그는 이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긴 세월 동안 전재운이 남긴 빈 자리를 메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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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룡길 아래 모인 거리회 회원들.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유기환·장정애·박희영·장봉완·김제훈·서방원·이원택·박남규씨. |
- 거룡의 상징 P크랙
둘째 마디를 떠나 노출된 곳으로 나가자 그 곳엔 하늘길, 동양길, 크로니길이 교차하는 슬랩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도 P크랙은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온사이트로 오른다면 P크랙으로 연결되는 길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나 다름없다. 슬랩을 올라 진자횡단을 하여 P크랙 하단부에 이르는 답을 모르고 가면 알피니즘의 본질에 충실한 일이기는 하나 위험부담을 안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곧바로 슬랩을 직상하다가 추락하는 일이 가끔 벌어진다. 장봉완·전재운·김제훈은 개척 당시 안전벨트를 가질 수 없었다. 변변한 등산화 한 켤레도 귀했다. 전재운과 김제훈은 크레타를 신었지만 장봉완은 정글화를 신고 보울라인 매듭으로 로프를 질끈 묶은 후 이 반반한 슬랩을 올랐다.
그리고 위로 전진이 안 되자 볼트를 박아 돌파하기 보단 우회하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볼트를 박고 경사 급한 슬랩을 넘어섰다면, 그래서 벙어리 구멍 홀드의 P크랙을 외면했다면 거룡길 상징의 하나인 P크랙은 이내 다른 루트가 되었을 것이 뻔한 일이다.
인수봉에 출근 도장은 물론, 아예 거처를 옮기다시피 했던 장봉완은 인수에서 잔뼈가 굵었다. 흔히들 인수파와 선인파로 나누어 말하자면 장봉완은 인수파였던 것이다. 박희영이 앞장서 나가는 동안 장봉완이 그의 확보를 맡는다. 한국등산학교의 학감답게 제동력이 좋은 튜브 하강기로 직접 확보를 보는 손놀림이 자연스럽다.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의 등반 경력은 손꼽힐 만큼 화려하다. 1979년 알프스 3대 북벽 등반부터 1986년 K2, 1988년 에베레스트까지도 모자라 지금은 또 다른 등반을 준비 중이다.
그는 에베레스트 등반 중 3캠프에서 위경련이 일어났을 때 조대행씨의 처방과 이의현씨의 보살핌을 잊지 않는다. 그렇게 원기를 되찾아 다시 정상을 오를 때도 장봉완은 셰르파에게 루트 공작을 맡기지 않았다. 1981년 일본의 하세가와가 왔을 때 인수봉을 함께 올랐고 피터 하벨러가 왔을 때는 취나드A 코스를, 쿠르티카가 왔을 때는 인수A 코스를 올랐다. 그런 경력에 비해 그가 남긴 기록, 즉 사진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남들 같으면 평생 한 번도 가기 힘든 남극을 다녀왔을 때도 사진 한 컷을 남기지 않았다. “허무주의자….” “모든 것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내 성격이야.” 이따금씩 짓는 그의 허탈한 표정에 바람 부는 벌판이 연상되지만 젊은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이 반짝였다. “‘편지’를 불렀던 임창제와 친했어. 빌라의 김태호는 우크렐레 잘 치고 방랑기가 있었지. 재운이는 ‘눈동자’란 노래를 좋아했고….”장경덕·곽효균·원중길·김기흥은 그 시절 한 식구처럼 지내며 인수봉에 출근 도장을 찍던 악우들의 이름이다.
반대로 위의 사람들은 장봉완의 이름을 떠올린다.
거룡길은 장봉완·전재운·김제훈의 작품이지만 거리회를 창립한 김조현과 김인식의 후원을 빼놓을 수 없다. 1959년 4월 5일 김조현 외에 20명이 모여 창립한 거리회는 산악회 틀은 갖추었지만 앞장서서 나갈 청년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72년도에 김조현·김인식씨는 인수봉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세 친구를 거리회로 영입한다. 3월 26일 거리회 청년부가 만들어졌고 젊은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재정을 지원했다.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이들은 1971년 가을부터 시작한 거룡길을 집중적으로 작업하여 1972년 5월 28일 개척을 완수한다. 인수봉에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내걸게 된 거리회의 창립회원들은 서울시산악연맹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서울시연맹 가맹단체 1번 자리를 차지한다.
“거저먹는 데가 없군.” 청년부장 이원택씨가 줄곧 선등을 쫓아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푸념 섞인 소리를 뱉어낸다. P크랙 위로 직상하는 다섯 마디의 긴 슬랩을 한 번에 치는 박희영을 결국 등반이 끝나서야 만난다. 바람도 없는 인수봉 정상엔 김제훈·장정애·서방원·박남규씨 등이 먼저 올라와 기다리고 있다. 완만해진 마지막 슬랩을 장봉완씨가 뛰듯이 오른다. “재미있어?” “힘들어. 만만한 게 없어.” “그런데 우리 산에 와서 전원 등정은 처음 있는 일이지?” “기록?” “그렇지.” 흔치 않은 기록을 안고 산장으로 돌아오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몇 년이나 되었는지 모를 만큼 오랜만에 나타난 회원 송정두씨다. 오늘도 인수봉은 또 하나의 만남을 선사해 준다. 이렇게 200여m에 불과한 바위벽에 묻힌 추억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울고 웃을 일이 그 어디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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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봉 거룡길 |
- 인수봉 거룡길 등반 가이드
인수봉 거룡길은 1972년 5월 거리회의 장봉완·김제훈과 고 전재운씨가 주축이 되어 개척한 남면의 바윗길이다. 개척 당시엔 인공등반이 가미된 루트였지만 지금은 거의 전 구간 자유등반이 가능하다. 처음엔 9마디였지만 지금은 긴 로프와 확보용 쌍볼트 설치로 6~7마디로 끊어서 등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루트 난이도는 첫 마디 볼트에 이르는 페이스와 셋째 마디와 넷째 마디 사이의 슬랩이 5.10a이며, P크랙으로 횡단하는 슬랩의 자유등반 난이도가 5.11b로 평가되어 있다.
- 첫 마디(35m)
빌라길과 하늘길 사이에 위치한 양호한 레이백 크랙에서 등반을 시작한다. 크랙 구간을 통과하면 스탠스가 양호한 곳에 이르고 이곳 오른쪽엔 사선 언더크랙이 있다. 로프가 짧고 장비가 부족하던 시절엔 한 마디를 끊던 곳이다. A0구간인 이곳을 넘어 사선 방향으로 직상하면 구멍 홀드가 나온다. 이곳에 발을 넣고 일어서는 동작은 과감성이 요구된다.
이 곳을 지나 반원형의 스탠스가 좋은 곳을 지나 테라스의 쌍볼트에 확보한 후 마디를 끊는다.
- 둘째 마디(20m)
인수봉 남면을 휘감아 도는 넓은 밴드를 따라 오른쪽으로 횡단하여 나간다.
시야가 트이는 넓은 곳에 도착하면 하늘길과 동양길, 그 옆으로 크로니길이 교차한다.
거룡길은 이곳에서 왼쪽 방향의 슬랩을 올라 P크랙을 향하여 오른다.
- 셋째 마디(30m)
슬랩을 직상하여 첫 볼트를 통과한 후 3개의 볼트를 지나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직상한다. 그 곳에서 다시 10m쯤 오르면 간격이 1.5m인 볼트 5개를 연속으로 지나게 된다. 이곳을 통과하여 슬랩에 있는 하강용 링에 로프를 클립, 진자횡단으로 P크랙 하단부로 건너간다.
- 넷째 마디(30m)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P크랙을 향해 오른다. 왼쪽에 움푹한 곳과 오른쪽 구멍 홀드에 재밍할 수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13m쯤 되는 거리에 5개의 볼트를 통과한다. 구멍 홀드는 스탠스와 홀드로는 양호하지만 확보물을 설치하기엔 좋지 않다. 그 곳에 프렌드를 설치하고 P크랙을 등반하여 10m 위에 있는 밴드상의 테라스에 도착하여 확보한다.
- 다섯째 마디(40m)
오른쪽 6m 위의 첫 볼트에 통과한 후 5개의 볼트를 지나기까지 계속 오른쪽 사선 방향으로 이동한다. 이후 혹점이 있는 방향으로 직상하여 쌍볼트와 피톤이 있는 테라스에 올라서 확보한다.
- 여섯째 마디(20m)
경사가 완만해진 슬랩을 통해 정상으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