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수봉 서면벽
○인수봉 서면벽○
-조용한 벽에 울린 알피니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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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봉 정상으로 향하는 크랙. 지금은 프렌드의 등장으로 자유등반이 가능해졌다. |
누군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그 즉시 만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말한다.
“벼르던 일 치고 신통한 일 없어. 역시 번개팅이 좋지.” 기약 없이 걸어둔 술 약속처럼 봄이 가도록 묻어두었던 인수봉 서면벽 등반도 그렇게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바위의 느낌은 시간의 변화와 함께 오르는 사람에 따라 수 없이 변한다. 그러나 그 앞에서 콩닥콩닥 뛰는 마음을 보면 바뀌는 것은 역시 사람이지 바위가 아님을 알게 된다. “자, 이제 마지막 크랙을 올라야지.” “영준아, 무섭냐?” “예. 갈비 부러지고 처음 선등하는 거예요.”
“그런데 천상 이런 스타일 밖에 안 되겠네요.” “래더 만드는 거야?” “사기꾼….”
“자유등반 한다고 해놓고 인공등반 해?” 프렌드를 크랙에 꽂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영준에게 사정없이 비아냥 멘트를 날리는 한상섭. 이미 두 사람은 술잔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산을 오른 듯하다.
“영준이는 알아서 가라고 하고 우리는 간식이나 먹지요.” “형근씨가 저 아래 맛있는 족발집이 있다는데 신경 쓰이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하산주라는데 일찍 내려가야겠어.” 온몸을 확보물처럼 사용하여 첫 마디 크랙과 침니를 끝낸 오늘의 취재팀. 오르는 것은 대충 해도 하산주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정상으로 가는 크랙과 한판 승부를 기다리는 한국산악회원 호경필·유형근·이영준. 인공등반 장비로 단단히 무장한 이기범과 한상섭은 혹시 이런 분위기를 기대한 것일까. 아무튼 좀체 손님 들지 않는 인수봉 서면벽에 사람소리 울려 퍼지고, 그 옆에서 함께 등반을 시작한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들의 장비소리까지 정겹다. 스위스의 속도등반가 에라드 로레탕은 셰르파에 의존하지 않고 무산소로 히말라야 8000m 3개봉 연속 등정과 함께 14좌를 세계 3번째로 완등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의 모든 능력 발휘를 위해 알피니즘은 고귀한 비밀을 간직한 미스터리로 남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로레탕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14좌를 완등한 멕시코의 철인 카를로스 카르솔리오 역시 8000m 14좌 전부를 무산소로 등정했다. 그리고 대부분 단독등반과 신루트로 올라서 세계의 철인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기록 경신이라는 목표 앞에 놓인 산악인들은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2005년의 시점에서 인수봉의 신루트를 대하는 것 역시 고민스럽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인수봉은 너무나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새로운 선을 마음 놓고 그을 수 있었던 시대의 선배들은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시대적 조류 따른 서면벽 등반원칙서면벽의 초등반은 1969년에 이루어졌다. 자그마한 체구에 재기로 똘똘 뭉친 백경호·최선웅 그리고 민상기씨가 주축이 되었고 지금은 대한산악연맹 회장이 된 이인정씨와 차수남씨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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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면벽 3마디 크랙등반 |
백경호씨는 고려대산악부 출신이지만 어떤 틀에 있기보다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1969년 2월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훈련대에 참가하여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운명을 달리한 오준보·홍종만씨는 백경호씨와 잘 어울리는 산악인들이었다. 그의 동생인 백명호씨 역시 고등학교와 대학산악부 출신이어서 백경호와 후배들과의 만남은 스스럼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어느 날 백경호씨는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하강하는 길에서 우연히 최선웅씨를 만난다. 백경호씨는 당시 구경하기 힘든 봉봉 하켄을 내보이며 이런 장비면 새로운 곳을 등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가능성을 제시했고 두 사람은 이내 의기투합하게 된다. 백경호씨는 이미 전년도인 1968년 가을, 미국인 친구 마이클과 숨은벽 능선에 올랐을 때 서면벽의 등반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었다. 그는 시끌벅적한 전면과 달리 너무도 조용한 서면벽을 바라보며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하산 길에 즉흥적으로 서면벽을 오를 꿈을 꾸며 그에 따른 원칙을 세운다.
첫째, 새로운 등로를 개척한다.
둘째, 가능한 짧은 시간 내에 등반한다.
셋째, 클라이밍 방식은 요세미티 스타일로 하며 가급적 볼트 사용을 피한다.
넷째, 아침 일찍 등반을 시작하기 위해 야영을 원칙으로 한다.
다섯째,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식량은 인스턴트 식으로 한다.
그들이 세운 원칙에는 이미 머메리의 등로주의에서 요세미티의 클린 클라이밍 사조까지도 반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수봉이 알프스였다면 어땠을까.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말라야로 방식을 옮겨가지 않았을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주문진에 무장공비가 출현해 술렁댔고 3선 개헌 반대로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바위를 향한 발길을 멈출 이유가 되질 않았다. 서면벽의 루트는 주말마다 하나씩 떨어져나갔다. 등반 개시 첫날인 1969년 8월 31일 백경호·최선웅·이인정·민상기 등은 안개와 비까지 뿌리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9시에 등반을 시작하여 11시 30분에 첫 마디 크랙과 침니를 끝냈다. 처녀 등반 첫 마디를 2시간 30분 만에 마쳤으니 양호한 속도라 할 수 있다. 둘째 마디의 크랙을 돌파하여 오후 6시 15분에 정상에 섰고, 하강을 할 땐 소낙비가 내렸으나 이미 제1코스 개척이라는 대어를 건진 후였다.
장비는 2동의 자일과 보조자일, 해머 2자루에 38개의 카라비너, 줄사다리 7개와 35개의 하켄을 사용했다. 등반 둘째 날은 일주일이 지난 9월 7일이었다. 두 번째 코스는 크랙 사이에 흙과 풀이 잔뜩 끼었고 바위는 단단하지 않았다. 백경호·최선웅·민상기 트리오가 다시 벽에 매달렸다.
그러나 오후 1시 45분에 등반을 시작한 탓에 오버행 아래까지 오르는 것으로 등반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2개의 피톤을 박아 하강을 완료한 시각은 오후 6시 30분.이들의 세 번째 개척 작업은 그 다음주인 9월 13일과 14일 양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때 백경호·최선웅·민상기 트리오가 다시 붙었으나 그날 오버행을 넘지 못했다. 등반은 결국 9월 26일과 27일의 네 번째 작업으로 이어졌고 백경호·최선웅·차수남씨가 상부의 오버행을 볼트 하나를 박고 넘어갔다.
이후 크랙을 오른 다음 다시 4개의 볼트를 박으며 1코스 크랙이 끝나는 지점의 밴드로 합류해 정상을 올랐다. 클린 클라이밍의 원칙을 세운 바 있지만 오버행 돌파를 위해 5개의 볼트는 피할 수 없었고 5개의 봉봉 하켄, 로스트 애로우와 앵글 하켄 5개가 사용되었다. 등반 순서는 왼쪽 제1코스가 첫 번째였으며 가장 오른쪽이 두 번째 그리고 중앙의 오버행을 세 번째로 돌파했다.
당시 오버행 아래로 이어지는 크랙엔 흙이 잔뜩 끼어 있어서 사레와 아이스 해머로 찍으면서 올라야 했다. 백경호·최선웅·민상기가 주축이 된 등반팀은 서면벽 개척 성공의 여세를 몰아 그 이듬해에 MRS(Mountain Research Society)라는 이름으로 뭉친다. 그리고 여기에 이형삼·오영복·이번·김찬진씨가 가세해 숨은벽 개척등반을 이루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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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면벽의 등반 루트에 붙은 취재팀. |
- 우연처럼 찾아온 운명적 만남
1969년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해였다. 인수봉에 그어진 길만 해도 우정길 A와 B, 그리고 하늘길과 서면 슬랩, 남면의 십자길과 동양길에 이르는 새로운 길들이 열렸고 굵직한 산악회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그해 2월에는 한국산악회의 해외원정훈련대가 설악산으로 떠났으나 10명의 젊은 산악인들이 눈사태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산악회는 설악산 10동지 조난을 계기로 등산아카데미의 기획과 프랑스 국립스키등산학교에 훈련대를 파견해 빙·설벽 등반교육을 체계적으로 받는 성과를 남겼다. 프렌치 테크닉이라 부르는 기술의 보급도 이때 처음 이루어졌다. 인수봉 서면벽에 눈을 돌려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 일도 그렇지만 백경호와 최선웅에게 1969년은 더 없이 중요한 해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최선웅은 25세의 나이로 한국 최초의 산악잡지 <등산> 편집장을 맡아 산악사에 지워지지 않을 기록을 남긴다. 이후 그는 지도제작에 참여해 지금까지 지도를 통한 산악운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백경호씨는 ‘뽕짝’이 판치던 당시, 요들송을 즐겨 부를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그는 60대 중반의 나이가 된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산노래 ‘숨은벽 찬가’의 노랫말처럼 아직도 산에 오르고 있다. 그의 주변엔 아직 바위를 떠나지 않는 산악동지회의 산 친구들이 늘 함께 한다. 크랙에 매달려 씨름하는 이영준의 소리가 들리지 않자 서면벽은 비로소 조용해졌다. 더 이상 설치할 프렌드가 떨어져서 마지막엔 소리를 질렀다는 그의 괴성을 들은 사람도 없다. 형근씨가 그의 뒤를 따라 말없이 등반을 마무리 짓는다. 금속성 장비소리를 내던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들도 어느덧 잠잠하다. 어떤 일을 처음 했다는 것은 참 운명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렇다.
등반을 마치고 백운산장에 들어서는데 뜻밖에 백경호씨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다소 극적이다. 그를 소개하자 주변의 젊은 클라이머들이 모여들었다. 이본 취나드가 쓰던 로프와 봉봉 하켄을 소지하게 된 일, 우드 팩을 깎아서 하켄을 대용하던 일, 이미 그때 미국의 <아메리칸 알파인저널>을 비롯한 유럽의 관련 서적들을 통해 세계 등반의 조류를 알고 있던 일까지. 평소 그의 바람대로 소박하고 격의 없는 곳에서 맥주 한 캔을 사이에 두고 어둠이 깔리도록 무용담이 이어졌다. 이제 산에서 그를 알아보는 젊은이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산을 오르는 일을 멈출 것 같지 않다. 세월이 좀더 흐른 뒤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들과 함께 산을 오르고 대화할 수 있었음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리고 덧붙여 그 시절이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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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봉 서면벽 개념도. |
- 인수봉 서면벽 제1코스 등반가이드
인수봉 서면벽은 1969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3개의 코스가 개척되었다. 제1코스는 8월 30일과 31일 백경호·최선웅·민상기·이인정, 제2코스는 9월 7일 백경호·최선웅·민상기, 제3코스는 9월 13일에서 14일 그리고 9월 26일에서 27일에 백경호·최선웅·민상기·차수남씨에 의해 마무리 되었다. 서면벽의 접근은 후면 하강길 왼쪽 아래 계곡으로 내려선 후 오른쪽 벽으로 진입한다. 제1번 코스의 출발은 인수C 코스 오른쪽의 동판이 있는 디에드르 크랙에서 한다. 제2코스는 서면벽 가장 오른편에 있는 디에드르 형태의 짧은 침니를 올라 좌향 크랙으로 진입하며, 제3코스는 중앙의 오버행을 바라보며 출발한다. 1코스는 개척 당시 2마디로 나누어 등반했지만 지금은 3마디로 끊어 등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1코스의 자유등반 난이도는 출발 부분의 디에드르 크랙이 5.9, 둘째 마디 부분이 5.10b, 상단 크랙이 5.10a로 평가되어 있으며 인공등반 난이도는 A2로 매겨져 있다. 등반이 끝난 후 하강은 등반 루트로 내려서거나 인수봉 정상으로 올라 후면 하강길을 이용하면 된다.
- 첫 마디(15m)
출발 부분의 디에드르 크랙은 개척 당시 나이프 하켄과 앵글 하켄을 치고 인공등반으로 올랐지만, 지금은 작은 호수의 프렌드를 설치한 후 레이백 자세로 오른다.
레이백 크랙이 끝나면 침니에 진입하여 프렌드를 설치하고 확보한다.
- 둘째 마디(25m)
침니를 따라 오르다가 밴드에서 오른쪽으로 팬듈럼하여 넘어간 후 잡목지대로 간다.
아래 부분의 침니 등반은 손과 발을 넓게 벌려 스테밍 등반이 가능하다.
- 셋째 마디(35m)
넒은 크랙에서 일정한 경사와 넓이를 지닌 곳으로 이어지는 직상 크랙을 오퍼지션(손과 발의 힘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하는 동작)과 재밍으로 넘어간다.
중간 호수에서 넓은 호수의 프렌드 설치가 가능하며 중간 부분의 작은 테라스를 거쳐 피톤이 설치된 곳까지 올라 확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