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연
2008. 3. 3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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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랑고의 꿈
“홍성암형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어요”

정승권씨가 지난 여름 적벽에 개척…국내 최고 난이도인 A5의 인공등반 루트
하드웨어 등산장비의 불모지였던 국내산악계에 트랑고사를 설립하여 남다른
열정으로 카라비너, 피켈, 크램폰, 암벽화 등 순수 국산제품을 개발해 암빙벽
등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던 홍성암(고려대산악회 OB)씨가 지난 7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그의 손에 의해 태어난 전문장비들은 클라이머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장비들로 성장했지만, 막 피려는 꽃송이를 앞에 두고 그는
안타깝게 운명하고 말았다.
이에 정승권(정승권등산학교 교장)씨는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등반지원을
아끼지 않던 선배를 기리기 위해 설악산 적벽에 한 개의 루트를 만들었다.
또 그 사이 정씨는 아끼던 후배가 적벽과 이웃한 장군봉에서 추락사하는
이중의 아픔도 겪었다. ‘등산과 죽음’. 클라이머라면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이 주제를 놓고 오늘도 등반 루트를 찾아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클라이머의
의식을 좇아가 본다 |

철 지난 바닷가에서 마음껏 뛰노는 후배들의 모습이 천진스럽기만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낸 후배를 마음속에 묻어두기 위해 뛰노는 그들의 천진난만함이 어쩌면 쉬운 삶의 한 방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린 왜 삶을 쉽게 살지 못하고 그토록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갈구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떠난 그를 생각 할 때면 그런 사고들이 머릿속을 회오리쳐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그 고통의 갈구가 자유를 찾아서라면 그 자유는 대체 무엇인가, 완성일까? 어제 장군봉에서 후배의 추모제를 마쳤다.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에 주체할 수 없는 혈기와 패기를 가슴에 안고 살던 그가 좋아하던 산,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산으로 떠난 것이다. 난 하루를 더 바닷가에서 머물며 마음속 깊이 그를 묻어두고 싶어 후배들과 함께 바닷가를 찾았다. 장마가 끝날 무렵인 7월 20일 설악산을 찾았다. 지난달 매킨리(6,904m) 원정에서 이루지 못했던 헌터봉 등반의 아쉬움과 힘겨운 해외 거벽등반 계획, 그리고 홍성암 선배의 죽음에 대한 보답이 자책으로 이어져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적벽 등반을 통해 풀고 싶었다. 적벽의 새로운 바윗길을 오르며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경험을 얻는 것이 적절한 해결책인 듯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해결할 수 없는 아쉬움과 힘겨움, 그리고 고뇌의 벽을 부셔버리고 싶었다. 이는 순전히 머리 속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이를 통해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싶은 자책감 때문이었다. 먹구름이 주기적으로 지나가며 장대비를 쏟아 부을 때마다 비선대 반석 위론 거센 물살이 넘쳐흘렀다. 산장 창문 너머로 올려다 보이는 붉은 암질의 적벽은 가슴에 화살을 맞고 피로 물든 모습이다. 당당하게 밑을 굽어보는 장군의 호위병 같은 적벽의 형상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거센 장대비의 물줄기도 적벽의 붉은 가슴에 젖어들지 못했다. 난 조용한 산장 마루에서 뒹굴며 망원경으로 등반선을 찾았고, 장대비와 신경전을 벌이며 보냈다. 내가 장대비의 주기적인 틈을 이용, 적벽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이미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홍성암 선배 생각하며 단독 등반으로 개척
난 적벽의 혼잡한 중앙벽을 벗어나 뚜렷한 등반선을 찾기 위해 가장 우측면을 선택했다. 장대비와 신경전을 버리며 찾아낸 등반선 대로 선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공등반의 극치를 이뤄 러프나 헤드, 훅의 사용은 불가피해졌다. 적벽에 매달려 하룻밤을 보내려던 계획도 적당한 시간을 맞춰 주었다. 잠자리는 크게 오버행 진 벽 아래라 폭우가 쏟아져도 문제될게 없었으나, 밤새 번쩍이는 번개와 요란한 천둥소리의 공포는 참기 어려운 문제였다. 꼼짝 달싹하기 힘든 해먹에서 좀 더 여유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나의 수고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해먹에 적응하는 요령이 자연스럽게 터득되었다. 위로 크게 오버행진 턱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산장에서 망원경으로 살펴보며 등반선을 그을 때는 이곳을 넘어서면 아름다운 등반선이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암질이 불안한 이곳이지만 다른 곳으로 우회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제 첫 피치 종료지점에 두 개의 볼트를 박았기에 두려움은 조금 가셨다. 감각이 무뎌져서인지 몸에 부착시킨 솔로이스트와 클로브 히치 매듭한 카라비너에 걸린 로프를 빼내기가 쉽지 않다. 오랜만에 하는 단독등반이라 그런지 매우 서툴다. 그 서투름으로 인해 몸의 에너지 소모량은 더욱 많아졌고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이후 확실한 확보물 설치로 마음이 안정된 순간부턴 새로운 바윗길에 선배의 의미를 담으려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불확실한 확보물을 설치한 후부턴 긴장으로 수없이 만들어놓은 의미 담긴 바윗길의 이름들이 순식간에 지워져버렸다. 지난 98년 겨울, 미국 콜로라도에서 선배가 제작한 피켈로 보여준 나의 등반기술은 세계 유명 빙벽등반가들의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선배는 그 대가로 내가 갖고 싶었던 혼합등반용 신발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또 다음해, 난 해외 등반비용과 새로 개발한 카라비너를 지원해 달라 했고 그로 인해 등반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고인이 된 지금 선배에게 남겨진 건 갚아야 할 빚더미와 가족들뿐이다. 예전 등반 비용을 보태 달라고 했던 일들이 가슴 아픈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난 이 루트의 지독한 긴장감을 바꾸고 싶지 않았고, 오래 간직하고 싶었기에 적벽 정수리에는 올라서지 않았다. 로프가 잘 빠질 수 있는 곳에 두 개의 볼트와 선배가 만든 카라비너를 남긴 채 적벽을 내려섰다. 뭇 클라이머들을 유혹시키려 A5의 난이도 적용과 바윗길 이름을 선배의 의미가 담긴 ‘트랑고의 꿈’으로 지었다. 바닷가 멀리 헤엄쳐 나갔다. 피부로 느껴는 바닷물의 차가운 느낌이 너무 상쾌했다. 동작을 멈춘 후, 사지를 펴고 가만히 바닷물에 떠보았다. 그리고 난 후 배설, 완벽한 자유인가?, 너무 편안했다. 우리만이 있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물위를 떠다니며 숨이 가빠 가슴이 터지도록 헤엄치며 놀았다. 그 동안 어수선했던 상념들이 사그라질 수 있도록, 하지만 ‘내일 또 다시 설악산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압박감에서 좀처럼 풀려나질 못했다. 어제 성백이를 보낸 그곳으로 다시 가야한다는 약속된 기다림이 너무 싫었다. 지금은 그저 바닷가에서 마구 뛰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예정대로 사진작가 손재식씨가 적벽 취재를 위해 백두대간의 마지막 구간을 마치고 두 명의 여인과 함께 우리가 뛰노는 바닷가에 왔다. 한 여자 분은 지난해 설악산에서 알게돼 불교서적을 보내준 터라, 반가움에 악수라도 청하고 싶었지만 수영복이 아닌 팬티 차림이라 어쩔 수 없이 함께 수영하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여기 헤엄치며 뛰노는 후배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그 동안 성백이의 사고로 마음이 많았던 그들과 오늘도 어제처럼 바닷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은 서울로 올라가야만 했고, 나 역시 취재 때문에 설악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난 좀더 시간을 갖기 위해 한적한 마을을 끼고 있는 외딴 계곡으로 자리를 옮겨, 며칠이면 다시 만날 후배들과 아쉬움에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이 돌아갈 수록 이번 취재를 연기하고 싶은 갈등이 밀려들었다. 아마도 그 동안 어수선한 상념들 속에서 성백이의 죽음이 가장 큰 영향이듯 했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할 일이 너무 많기에 어수선한 마음을 스스로 추슬러야 했다. 서늘한 바람결이 어두워질 때까지 내가 우리를 붙잡아 놓은 것처럼 난 이들을 이곳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아 놓았다. 그렇지만 점점 짙게 밀려오는 어둠을 어찌하리. 어둠이 짙게 깔린 미시령과 설악산 갈림길에서 자동차 불빛으로 적막감을 쫓아내며 후배 악동들과 헤어졌다.
정상에 트랑고 카라비너를 남기고…

늦은 밤, 비선대 산장에 들어섰을 때 서늘한 밤 공기가 피부에 느껴졌지만 몸의 열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몸의 열기가 식기 전에 바닷물에 쪄든 몸을 계곡 물로 씻어야 할 것 같았다. 계곡 물소리와 물의 찬 냉기는 가을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고, 계곡 위로 뻥 뚫린 밤하늘에는 짙게 가리운 구름이 곧 비라도 퍼부을 것처럼 보였다. 비선대 산장의 적막함이 오늘은 몹시 싫었다. 내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으면 했다. 정당한 이유로 편하고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런 생각들은 분명 성백이의 죽음과 이어져 내 마음이 위축되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후배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후배의 혈기와 폐기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비선대의 밤은 온통 어수선한 상념으로 가득 찼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아침 하늘은 맑았다. 어제의 어둠은 오늘의 밝음과 함께 침침했던 나의 모든 상념들을 머리 속에서 날려 버렸다. 단지 어젯밤 꿈속에 수진이 엄마에게 왕따 당하는 악몽만이 잔 기억으로 남았다.
“재식이 형! 촬영을 어떻게 할건가요? ” “……” “형! 미안하지만 집중력 때문에 연출은 하고싶지 않아요.” “그건 그래 야지” “그래서 나 혼자 등반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런데 내가 오버행 밑까지는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홀링 로프가 걸려 있으니 그 로프를 이용하면 될 겁니다 .”
이 바윗길을 처음 오른 지가 한달 전인데도 확보물 설치 지점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길의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 남겨놓은 첫번째 헤드의 와이어가 끊어져 있지 않고 변함없이 붙어있었다. 더 올라가 봐야 알겠지만 초등 후에 아무도 등반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등반은 초등할 때 보다 쉽게 진행이 되었지만, 그때보다는 내가 서두른다는 것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며, 그로 인해 등반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올라 갈수록 재등에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이지 쉬운 구간을 등반할 때는 내가 등급을 너무 높게 책정한 것 같아 자책감을 갖기도 했다.
“모든 상념을 씻어 버린 하루의 등반”
하지만 다시 긴장감에 사로잡힐 때는 처음의 등반 감각을 그대로 인정하려 했다. 무진 애를 쓰며 신중하려고 노력했다. 어젯밤의 악몽이 신중 하려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 이 등반을 끝으로 두달간의 겉치레 같은 모든 일들이 마무리된다는 생각에 억눌렀던 조급함이 되살아났다. 두번째 피치의 등반에 어려움은 초등할 때에 회수하지 않은 장비로 상당히 반감되었다. 처음 오를 때의 기억들이 정확하고 빠르게 되살아났다. 훅의 위치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확보물의 종류와 크기도 정확하게 기억되었다. 초등 때 이 구간이 너무 힘들어 오래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 볼트가 손에 잡힐 듯 했다. 마지막 두 개의 볼트에 걸어놓은 트랑고사 웨빙과 카라비너는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마지막 확보물인 헤드를 지나 카라비너에 손이 닿자, 그동안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갚아야 할 빚을 모두 갚는 통쾌함의 전율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적벽의 그림자는 비선대에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밑으로 던진 60m 로프 두 줄 끝은 엉킴 없이 통쾌하게 뻗어 내렸고, 하강기로 그 로프에 의지해 몸을 허공에 띄우는 순간 그 동안 폭풍처럼 휘몰아 쳤던 긴장감과 산만했던 상념들이 깨끗하게 모두 날아가 버리고 평온함이 찾아들었다.
글 정승권(CHUNG60@chollian.net)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8년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으며, 매킨리, 요세미티 등지에서 전위적인 등반을 해온 전천후
클라이머. 현재 수유동에서 클라이밍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 손재식(sohnbal@orgio.net) 프리랜서 사진작가.
특히 암빙벽 등 전문 산악사진을 즐겨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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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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